“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참된세상이...
청도.
청도군은 대부분 산으로 이뤄져 있어 명소가 많다.
청도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 화랑정신과 우리나라 근대화의 디딤돌이 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서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자연까지 공존하는 청도는 지친 도시민의 최적의 힐링지로 손색이 없다. 청도에는 천년고찰 운문사를 비롯해 청도읍성(석빙고)·청도신화랑풍류마을·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청도박물관 등 곳곳에 산재한 풍부한 볼거리 외에도 레일을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레일바이크, 주말마+다 열리는 청도소싸움, 한바탕 웃을 수 있는 한국코미디타운, 운문삼계리 계곡, 이색적인 와인터널과 별빛축제 등 체험거리도 즐비하다.
청도읍 전경. 청도는 예로부터 산이 푸르고 물 맑고 인심이 순후해 ‘삼청(三淸)의 고장’으로 불리웠다. | 청도군 제공
화양읍 남산골 계곡과 운문면 운문댐 하류보, 삼계리 계곡 등은 예로부터 피서지로 유명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옥한 황토서 자란 복숭아 ‘각광’ 4월이면 분홍빛 자태 복사꽃 넘실 사진작가 봄철 출사지로 손꼽혀 청도 5경 연꽃밭 ‘유호연지’도 주목.
청도하면 감, 청도반시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요즘은 그에 못지 않게 청도복숭아의 명성도 높다. 청도의 국도변을 달리다 보면 지금은 어딜가나 잘 익은 복숭아를 만날 수 있다. 유등마을은 일명 ‘복사꽃 마을’로 불릴 정도로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다. 4월이면 마을 앞 노산지 주변은 물론 산등성이까지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을 찾아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찾는 출사지로도 손꼽힌다.

이슬미로라는 제법 낭만적인 이름의 도로를 따라 뒤쪽으로는 노정산이, 앞쪽으로는 노산지를 끼고 유등마을이 펼쳐진다. 길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유등 2리의 옛이름은 노산리. 이슬 로(露), 뫼 산(山)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이슬뫼가 맞겠다. 그렇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이슬미라고 부르다보니 길 이름도 이슬미로가 되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용이 되지못한 이무기를 이슬이라고 하는데 마을 인근 한내들에 물이 깊어 이슬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이슬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어떤 것이 맞다 그르다 논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유등마을에서 빠트려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유호연지’이다.

유등지로 부르지만 버드나무 두른 연못에 연꽃이 핀다는 ‘유호연지(柳湖蓮池)’가 정식이름이다. 해마다 칠팔월이면 연꽃이 만발한 풍경이 아름다워 청도 팔경 중 5경으로 꼽히며 전국 명승지 100선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염오(離諸染汚), 진흙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연지 주변에 조성해놓은 데크를 따라 한바퀴 걸어보는 것도 좋다. 연지 안에 있는 ‘군자정’은 조선시대 시집간 딸들이 친정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코미디 체험관인 한국코미디타운과 상징물인 물구나무 선 ‘꼭두’. <청도군 제공>
숨겨진 비경-남산 13곡
청도에서 널리 알려진 계곡은 운문삼계리다. 운문면과 울산 언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 펼쳐진 삼계리는 울창한 숲과 가지산(해발 1천240m)에서 발원한 계곡물로 어우러져 피서철엔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붐빈다. 이에 못지않게 숲과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로 한여름에 한기가 가득한 남산13곡(청도 화양읍 교촌리 일원)은 숨은 비경으로 꼽힌다. 남산은 해발 870m에 불과하지만 6개 읍·면을 한 눈에 바라보며 마치 포옹하여 감싸고 있는 듯한 명산으로 청도군의 진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남산을 발원지로 하는 남산계곡(일명 남산골)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절벽, 소(沼)를 이루며 청담옥수 같은 맑은 물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속까지 시원한 냉기를 느끼게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초입부에 화산동문이라 새겨진 각자(刻字)를 시작으로 20여개의 각석문도 볼거리다. 남산13곡에 따라 조성된 탐방길은 시원한 계곡의 풍광과 더불어 선인들의 문화적 향기를 넉넉히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청도군은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소싸움은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문화로 이제는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가 됐다. 청도 1박2일 여행을 떠난다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청도 소싸움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청도 와인터널, 프로방스, 용암온천 등 겨울 청도여행으로 들러보기 좋은 명소들이 있다.
청도 와인터널.
청도 가볼만한 곳으로 유명한 청도 와인터널은 온도가 섭씨 13~15도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터널로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밖의 기온보다 높아 계절을 타지 않는 관광 명소다. 청도 와인터널은 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완공된 터널로 천정이 붉은 벽돌로 되어 있으며 벽면을 자연석으로 구성되어 있어 터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 수많은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는 터널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와인 만들기', '와인 시음', '감 따기 체험' 등 현장체험 프로그램도 있어 오감을 만족하는 청도 가볼만한 곳이다.

청도 와인터널에서 와인 시음을 할 수 있다.
용암온천.
오는 12월 13일 리모델링을 마치고 새롭게 오픈하는 청도 용암온천은 청도 군민뿐만 아니라 대구, 경산 등 주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온천이다. 지하 1008m의 43.7도의 천연 광천 온천수를 직수 공급하는 온천으로 만성피로회복, 면역증강, 신경계통 질환 및 노폐물 제거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그밖에 옥으로 만든 옥대 온천장, 미국 직수입 아쿠아테라피, 각종 테마탕, 가족탕, 힐링 객실 등 겨울 청도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리모델링을 마치고 개장하는 만큼 청도 1박2일 여행 코스로 고려해보자.
프로방스
청도 프로방스는 연인,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 좋은 청도 가볼만한 곳이다. 1996년 오픈한 청도 테마랜드를 2012년 청도 프로방스 포토랜드로 새롭게 단장을 하여 선보이고 있는 곳으로 프랑스 마을의 아름다움을 재현하여 볼거리가 많다. 프랑스 마을 중에서 고흐, 세잔, 샤갈, 마티스 등이 생전 좋아했다던 남동부 지역으로 아름다운 청도 프로방스를 배경 삼아 인생 사진을 찍기에 좋은 명소다. 아름다운 빛 축제가 유명한 청도 프로방스는 주변으로 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청도 1박2일의 마지막 코스로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청도 프로방스는 빛 축제가 유명하다.


가볼만한 곳으로 '청도 프로방스'를 꼽을 수 있다. 이곳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이슬미로 272-23에 위치한 테마파크다. 남프랑스가 주는 멋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청도 프로방스는 다양한 포토존과 소품이 있으며 밤이 되면 아름다운 빛의 공간을 만나볼 수 있다. 세계 최초 하트 테마 포토존인 '프로포즈 가든'에서는 해가 뜨는 낮에도,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예쁜 정원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빛의 숲'에서는 빛으로 이루어진 동물들과 빛 포토존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 아름다운 빛의 축제, 일루미네이션 라이팅쇼를 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져 더욱 재미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청도 가볼만한곳 '청도 프로방스'의 '러브로드' 역시 다양한 포토존이 있으며, 큐피드 로드에서는 하트 모양으로 이루어진 빛의 길을 거닐어 볼 수 있다. 한편, 밀양 가볼만한곳 포토랜드는 가족,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최근에는 연말 시즌을 맞이하여 청도 프로방스 크리스마스 산타마을 빛축제가 열리고 있기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 프로방스'에 방문해봐도 좋겠다.
박물관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이서로 567에 위치해 있으며 무료의 관람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청도 박물관의 '고고역사관'에서는 청도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청도지역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등 다양한 고고역사유물을 볼 수 있다.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박물관의 민속관에서는 근대 이전 청도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청도 사람들이 기증하고 기탁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박물관에서는 11월 20일부터 2019년 2월 10일까지 청도박물관 특별전시 <선비의 길을 묻다 - 탁영 김일손>전을 개최한다. 탁영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며 그가 남긴 유물과 각종 역사적 자료를 볼 수 있다. 탁영 김일손 종택의 비공개 유물들로 진행하는 전시는 김일손 선생을 조명하는 첫 전시회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역사와 문화를 한 자리에서 경험하고 싶다면 청도 가볼만한곳 '청도박물관'
운문사,
운문사는 청도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진흥왕 21년에 창건하고 1277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유서깊은 전통 사찰.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광대사가 중건한 사찰로 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신라시대에는 대작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고, 진평왕 13년 원광이 크게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기는 했으나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중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청도 운문사/사진=SBS 제공

SBS 불타는청춘’에서는 센 언니 4인방 (신효범, 강문영,김혜림,김완선)이 청도 운문사에서 만남을 갖는 모습이 방영됐다.
이와 함께 청도 운문사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라 네티즌의 관심을 받고 있다.
경북 청도에 위치한 운문사는 특히 가을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운문사 내부와 주위의 산에 물드는 가을 단풍 경치가 일품이기 때문.
청도 운문사에 꼭 가을에 가야하는 이유는 또 있다. 경북 청도는 특산물로 감이 유명한 지역. 가로수로 감나무를 심어 놔, 가을 즈음 청도를 방문하면 주렁주렁 열린 붉은 감을 원없이 볼 수 있다.
운문사 인근에는 오토캠핑장도 몇 군데 있기 때문에, 가을 경치를 즐기며 캠핑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청도군에서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운문사는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해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신라 진평왕22년)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됐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10년)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인조7년) 년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뤘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했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른다.
그 후 제5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내원암·북대암등을 중건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했고, 1842년 금당을 중건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해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으며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 외 30여동의 건물 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운문사 이야기1-채헌의 ‘호거산운문사사적’
운문사의 솔바람 둘레길은 운문사를 배경으로 구성된 것으로 운문사의 탐방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운문사는 평평하고 너른 대지 위에 수십 채 기와집이 들어앉았다.
이른바 평지가람이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그리고 이들이 이룬 높고 낮은 봉우리가 돌아가며 절을 감싸안고 있다.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하다. 모든 건물이 돌아앉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
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멀게 된다고도 한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향한 집이 사람 살기에 좋은 것이다.
이러한 터전에 절이 들어선 것은 멀리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이라는 스님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지금의 운문사에서 5리쯤 떨어진 금수동에 들어와 3년을 수도하여 득도한 어느 도승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 도우 10여 명과 함께 갑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 오갑사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가운데 자리잡은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 9000보 지점의 가슬갑사, 남쪽 7리쯤에 있던 천문갑사, 서쪽 10리에 자리한 대비갑사, 그리고 북쪽 8리에 위치한 소보갑사 등이었다.
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다.
그밖에는 대비갑사만이 대비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다른 절은 모두 없어졌다.
‘운문사사적’은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원광 법사를 들고 있다. 가슬갑사에서 두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준 바로 그 스님이다.
그 내용은 591년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처음 3년 동안 대작갑사에 머물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후 운문사의 사정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다시 역사 위로 떠오른다.
‘운문사사적’에서 두번째 중창자, ‘삼국유사’에서 개산조로 꼽는 보양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삼국유사’는 그 전설적인 얘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로 서해를 건너자니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청하여 금빛 비단 가사한 벌을 주면서 그의 아들 이목(璃目)을 데리고 가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당부했다.
보양스님이 절을 세우려고 북쪽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니 산 아래 5층 황탑이 보였다.
그래서 내려와 찾아보았는데 아무 흔적도 없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러자 용왕이 ‘작갑’, 곧 ‘까치곶’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그곳을 파 보니 무수한 벽돌이 묻혀 있었고, 마침내 그 벽돌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이보다 앞서 보양스님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추화의 봉성사에 머물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의 무리들이 견성에 웅거하여 거만을 부리는 통에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왕건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묘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보양스님이 이곳에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듣고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서 부치도록 했으며, 태조 20년(937)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고려왕조의 창업에 군사적으로 한몫을 거들어 사세를 키운 운문사는 이윽고 원응국사 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인종이 즉위하던 1122년 왕사의 자리에 오른 스님은 인종 7년(1129) 운문사로 들어왔다. 이때 나라에서는 신수와 신원 등의 토지 200결과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켜 만세토록 향화를 받들게 했으며, 스님이 운문사를 중창하자 ‘운문선원상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절은 나라의 500선찰 가운데 제2선찰이 됐다.
운문사 이야기2- 일연의 ‘삼국유사’
몽골의 간섭기가 시작되는 1277년 운문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스님을 맞이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다 이미 72세의 노경에 든 스님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민족의 문화유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
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운문사에서 스님의 자취가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만도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이후 운문사의 내력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조를 넘기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개의 사찰들이 그러하듯 임진왜란의 병화를 면하지 못한 듯하고, 그뒤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20세기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넘겼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으며, 차츰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오늘날은 언제나 200명 이상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수도하는 비구니들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 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 이만한 규모의 절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조차 앞도 뒤도 아닌 허리쯤에 위치한 점도 의아스럽다.
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절의 서쪽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 약야계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 길의 오른편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만세루, 그밖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왼편으로는 2기의 석탑과 오백전, 작압전, 관음전, 기타 몇 채의 전각이 나란하다. 운문사의 예배공간이자 신앙공간이다. 그 나머지 건물군은 일상생활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수행공간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것은 예배공간까지이다.
운문사에는 당시 사찰의 중창과 내력을 기록한 원응국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1277년에는 일연선사가 운문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가 쇠퇴하고 임진왜란 때는 사찰의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만세루·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97년 승가대학원이 개설됐다.
운문사 뜰에 있는 수령 500년 가량 된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180호다. | 청도군 제공.
운문사 반경 6km이내는 가볼만한 곳이 청도신화랑 풍류마을,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청도베이스볼파크, 운문산자연휴양림,공암둘레길이 있다. 출처 : 경상북도.

1500년 역사 담은 '운문사지'
운문사는 약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구한 고찰입니다. 현재는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데요, 호거산과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 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생태보존지역으로도 지정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도량이 아름답다고 알려져서 많은 참배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유명한 기도처인 사리암도 있구요.
역사적으로 보면, 원광국사의 화랑오계가 설해진 곳이며 고려시대 원응국사는 가지산 선문의 중흥조로 운문사를 전국 제2의 선찰로 만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충렬왕 때 일연스님께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설송 연초대사는 운문사를 선교양종의 통합 도량으로 융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운악 두안스님 때는 만일 염불 결사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운문사가 1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문사지가 제대로 된 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근현대의 비구니 승가교육의 역사와 1958년 비구니 강원 개설 이후 주석했던 비구니 스님들과 명성 회주스님의 운문사 중창의 역사를 포함하여 운문사 관련 모든 자료들을 모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형의 것들은 무너지고 잊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중한 승가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기록의 불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력을 가지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1500년 운문사 역사를 담은 '운문사지' 원래 한 권 분량으로 계획했었는데 하다보니 원고 분량과 자료가 늘어나 두 권으로 간행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본문인 운문사지와 그에 따른 자료편을 따로 엮었습니다. 운문사지에는 창건부터 근현대 운문사의 역사와 인물, 가람의 변화와 문화재, 승가대학의 역사와 활동들 그리고 운문사와 관련한 시문들까지 총망라해서 수록했고요, 자료편에서는 운문사의 역사적 사적 자료들을 원문과 현대 번역을 함께 실었고, 흩어져있던 운문사 관련 자료들- 비문들, 기문이나 화기, 옛 문서들 시편 등을 모두 집대성하여 엮었습니다. 이번 운문사지 간행을 통해 주지인 저도 운문사의 역사를 자세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이 자료를 보고 많은 분들이 운문사의 가치를 더욱 알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운문사지』라는 제목으로 1980년 한국사지총서의 하나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기존의 자료들을 한문원전 그대로 필사본 그대로 엮어 놓은 것이라 일반인들이 해독해서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 운문사지에서는 이것을 모두 현대어로 번역하여 읽기 쉽게 하여 대중적인 사료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운문사 사적 자료가 1718년 「호거산 운문사 사적」과 1914년 「청도군 운문사 사적」정도가 있었는데.. 이것도 한문으로 되어 있고요, 조선시대 이후의 운문사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간행된 운문사지는 조선시대 이후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 운문사의 근현대 역사를 기록하여 집대성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운문사가 비구니 교육도량이 된 1958년 이후의 역사를 기록해 한국불교사의 한 페이지인 비구니 역사를 좀 더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어서 현대 부분 자료들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소욕지족의 삶.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삶.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존재하는 자체로 존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존재하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먹을 수 있어 감사하고 볼 수 있어 감사하고, 걸어다닐 수 있어 감사합니다. 둘째는 모든 일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작은 꽃을 보고도 감동하고 아기의 웃음소리에도 감동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감동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너무 삭막한 것 같아요. 많이 감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감탄입니다.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찬탄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정말 좋구나. 잘 했어...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소욕지족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많이 감사하고 감동하고 감탄하는 부처님 오신 날 맞으시길 바랍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그리스와 인도문화가 혼합된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탁실라 일대의 간다라(Gandhara) 지역을 거쳐 중국의 후한(25~220) 명제(재위 57~75)때 중국에 왔다. 명제가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금빛 사람을 꿈에 보고, 채음과 진경을 보내서 불법을 천축에서 구해오게 했다. 이후 인도에서 온 불승 섭마등과 축법란을 위해서 67년에 창건한 중국 최초의 사찰이 허난성 뤄양(낙양)의 백마사(白馬寺)다. 백마사는 보경사의 연기설화와 연결된다. 창건주 지명법사의 전생이 백마와 백마사 주지 일조였으며, 서역에서 가져온 8면 보경을 봉안한 후 603년 대가람이 완성되니 그 절이 바로 원진국사(1171~ 1221)와 오암선사(1710~1792) 등을 배출한 포항의 내연산 보경사다. 청도 운문구곡, 박하담의 ‘운문구곡가’ 서시다. ‘하늘이 운문을 열고 땅이 신령을 기르니/ 그 가운데 산수가 자연스레 맑아라/ 지팡이 짚고 나막신으로 소요하며 진경을 찾으니/ 무이(武夷)의 굽이굽이에 노래하여 화답하네’. 청도 박곡리사지." ‘세속오계’ 산실 가슬갑사 비롯한 다섯 개 갑사 중 한 곳 추정. 오갑사, 대작갑사 중심으로 동서남북 4곳에 사찰 건립, 오갑사 관련 중요 인물로는 세속오계 제정한 원광 스님, 청도군, 가슬갑사를 비롯해 청도 박곡리사지 전경. 북미대륙 최고령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안내소를 나서자 넓은 공지에 자라는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루터기에서 나온 다수의 줄기 대신 단 하나의 줄기로 자라는 북미대륙 최고령 은행나무는 당당하고 매끈했다. 먼저 거대한 줄기를 두 팔로 안아보았다. 230여 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줄기는 굵었다. 수고(樹高) 33m, 가슴 높이 직경 1m 이상으로 자란 이 은행나무의 머나먼 행로를 헤아려보았다. 조선의 청도에서 유럽대륙(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으로 건너간 은행나무의 후손이 열매를 맺어 영국 땅에서 싹을 틔워 자라다가, 묘목의 신분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의 동쪽 구석에 마침내 자리 잡은 긴 여정,
식물원 미국 최고령 은행나무(왼쪽). 경북도 기념물 109호 은행나무. [Bartram’s Garden 제공, 청도군 제공] 은행나무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은행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가로수나 정원수로 쉽게 볼 수 있고, 식물이나 자연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 쉽게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리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용문사 은행나무), 세계에서 가장 굵은 은행나무(반계리 은행나무), 세계에서 옮겨 심은 가장 큰 나무(용계리 은행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미대륙 최초의 은행나무를 찾아 나선 계기는 중국과 독일 학자들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서 비롯했다. 분류학회지 ‘탁손’에 발표한 ‘중국 밖으로의 은행나무 전파 역사’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92개체), 한국(11개체), 일본(18개체), 유럽(14개체), 미국(10개체)에서 선정한 145개체의 노거수 은행나무를 대상으로 분자유전학적 분석을 통해 은행나무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경로를 밝힌다. 청도에는 운문사 처진소나무 외에도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이서면에는 수령 13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301호 대전리 은행나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29m, 둘레가 10.5m에 이른다. 옛날 이 마을을 지나던 여인이 물을 마시려다 우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여인이 주머니에 갖고 있던 은행 알이 싹터서 자라는 동안 우물은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살아 남았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온다.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의 잎이 한꺼번에 조용히 떨어지면 풍년이 들고, 시름시름 떨어지면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청도읍 적천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402호)도 800~10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고 전해진다. 높이 28m, 둘레 11m의 암나무로 많은 열매가 달린다. 이밖에 매전면 동산리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295호), 각북면 덕촌리 털왕버들(천연기념물 298호), 청도읍 상리의 돌배나무(경북도기념물 119호), 각북면 명대리 뚝향나무(경북도기념물 100호), 매전면 하평리 은행나무(경북도기념물 109호) 등 수백 년 된 노거수들이 많다. 풍각면 봉기리에는 3층석탑이 우뚝 솟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높이 5.47m에 상륜부는 없어지고 기단부와 탑신부는 잘 보존돼 있다. 보물 113호로, 상승감과 안정감을 주는 아름다운 탑으로 꼽힌다. 청도읍 원리의 적천사와 각북면 오산리의 용천사 등 신라 천년의 고찰도 많다.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 4년(664년)에 원효대사가, 용천사는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법사가 창건했다. 높이 12.47m, 폭 5.3m의 거대한 적천사 괘불도 및 지주는 보물 1432호다. 용천사는 전성기 때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청도의 중심지인 화양읍 동천리에는 조선 숙종 때 축조된 석빙고(보물 323호)가 있다. 빙실 바닥의 길이가 14.75m, 폭 5m, 높이 4.4m다. 화강암을 이용한 아치형으로 전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됐다. 인근에 청도읍성(경북도기념물 103호)이 있다. 지방관아와 민가가 이 울타리 안에 있었으며 성벽 등이 대부분 소실되고 파괴돼 2007년부터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읍성 내에는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도주관(경북도유형문화재 212호)과 동헌(경북도문화재자료 403호) 등이 남아 있다. 금천면에는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벼슬에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살았던 ‘임당리 김씨 고택’(중요민속자료 245호)이 있다. 400여 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금천면 신지리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106호)은 조선시대 상류 지배계층의 살림집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운강고택의 별서(별장)인 만화정은 동창천변의 아름다운 정자로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묵었던 곳이다. 전국 제일 청도반시와 전통의 구경거리 소싸움.청도는 가을이면 고장 전체가 붉게 탄다. 마을 마다 지천인 감이 익기 때문이다. 출향인들은 고향을 생각할 때 마다 감부터 떠올린다. 어릴 때 아침 일찍 감꽃을 주워 실이나 지푸라기에 꿰어 목에 걸고 다녔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청도의 감은 납작감인 반시다. ‘청도반시’라 부른다. 청도반시는 육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으며 씨가 없다. 청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재배하면 씨가 생긴다. 청도반시는 청도에서만 생산되는, 전국 제일의 홍시로 이름이 높다. 감말랭이를 비롯해 반건시·아이스홍시·감와인·감식초·감한과·감화장품 등 청도반시를 이용한 가공산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화양읍 송금리의 ‘와인터널’은 감와인 숙성저장고와 와인카페로 인기가 높다. 청도반시를 이용한 감물염색업체도 34곳에 이른다. 해마다 10월이면 청도반시축제가 열린다. 화양읍의 복숭아밭 전경. 청도의 복숭아 생산량은 전국의 18%를 차지한다. 해마다 4월 중순쯤이면 붉게 물든 복사꽃이 도화선경을 연출한다. | 청도군 제공 복숭아와 미나리도 빼놓을 수 없는 청도의 특산물이다. 복숭아는 당도가 높고 과즙이 많으며, 전국 생산량의 18%를 차지한다. 해마다 4월 중순쯤이면 붉게 물든 복사꽃이 도화선경을 연출한다. 미나리도 씹는 맛이 달고 연해 인기다. 특히 청도읍 한재지역에서 나는 ‘한재 미나리’가 유명하다. 청도 상설 소싸움경기장. 청도는 소싸움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경마장 처럼 돈을 걸고 소싸움을 관람할 수 있다. | 청도군 제공 청도는 소싸움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3~4월이면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린다. 청도군이 소규모 민속놀이였던 소싸움을 1990년부터 한국의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축제로 발전시켰다. 화양읍 삼신리에는 돔 형태의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 있다. 경마장의 마권(馬券)처럼 ‘우권(牛券)’을 구입해 돈을 걸고 소싸움을 관람하는 곳이다. 해마다 전국의 싸움소 100~200마리가 출전,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벌인다. 이전에는 서원천변에서 열렸으나 2009년부터는 실내 경기장인 상설소싸움경기장에서 진행된다. 소싸움 막간에 국악공연, 캐릭터쇼, 라운드걸 퍼포먼스, 전통무용공연 등 각종 문화공연이 펼쳐지고 소 사랑 미술대전, 농기구 특별전, 우사 및 동물농장 체험, 로데오 체험 등 부대행사가 다양하게 마련된다.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청도군은 ‘스페인 투우 못지 않은 세계적인 문화관광상품’으로 자부하고 있다. 또 해마다 정월대보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달집 태우기 행사가 열리는 등 각종 민속놀이가 잘 보존돼 이어져 오고 있다. 경북 청도군의 중심지인 화양읍 동천리에 있는 청도읍성. 과거 지방관아와 민가가 이 성 안에 있었으며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청도군 제공 팔조령 운해. 앞에 보이는 산이 청도의 진산인 남산이다. | 청도군 제공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106호). 조선시대 상류 지배계층의 살림집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청도군 제공 청도 남산 중턱에 있는 낙대폭포. 예로부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약수폭포로도 불린다. | 청도군 제공 운문사 돌담길. | 청도군 제공 운문사에서 울산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는 삼계리계곡.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대구와 울산 등 인근 도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 청도군 제공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경북 청도 - 푸른 산, 맑은 물, 문화예술의 고장 (신택리지, 경향신문) 사진: 청도군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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