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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운주사.

창건 설화

*도선국사와 천불천탑. 

옛날 도선대사가 하룻밤 사이에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우기로 하고, 하늘에 기도드리자 천여 명의 선동선녀가 내려와서 불상과 불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사는 반드시 하룻밤 사이, 첫닭이 울기 전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날이 새면 선동선녀가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도선대사는 해가 뜨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 일봉암이라고 하는 바위에 해를 묶어 두었다. 새벽녘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워 천불천탑이 거의 다 조성되고, 이제 와불만 일으켜 세우면 되었다. 그런데 일을 돕던 대사의 상좌가 일에 지쳐 그만 첫닭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와불을 세우려던 하늘의 선동선녀들이 일순간에 모두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서 와불을 세우지 못하고, 지금도 그렇게 누워 있는 상태로 있다.

*운주사의 내력
운주도인이 국태민안을 위해 천일기도를 드리는데, 마지막 기도가 끝날 무렵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황금빛 옷을 입은 천동천녀가 내려와 흙과 돌로 탑을 쌓았다. 탑을 다 쌓은 뒤에 천동천녀가 화해서 불상이 되어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다. 천불천탑이 조성되자 운주도인은 마을사람들에게 천불과 천탑을 모셨다고 알렸으나 모두 믿지 않자, 운주도인은 거북이로 변하여 죽을 때까지 마을사람들을 천불천탑이 조성된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천불이 있는 산이라 하여 ‘천불산’이라 부르고, 운주도사가 지은 절이라 하여 ‘운주사’라 부르게 되었다. 도사가 화신한 거북이는 늙어 절 뒷산으로 올라가 큰 바위로 변했는데, 이 산을 영구산(靈龜山)이라 부른다.

*범산과 옥룡자
범산을 ‘덤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도선국사에서 시작된다. 방방곡곡에 절을 세운 도선국사가 지금의 청풍면 차동 주위의 산수를 보고 운주사의 터를 잡았다. 국사는 기쁜 얼굴로 대웅전 터를 잡은 뒤에 좌향에 기세가 허함을 발견하고 정성스럽게 산신께 기도를 드렸다. 이에 산신이 응답하기를 너의 뜻을 받들어 허락하니 고을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게 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국사는 천지가 고요한 시간에 산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으나 마을 건너편 외딴집의 며느리가 범산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마을사람들 모두가 알게 된다. 그러자 도선국사는 산을 버려두고 몸을 감춘 다음, 다시 도력으로 주안산 문필봉을 만들고 금오산의 일맥에 바위가 솟아오르게 한다. 그 후 도선국사는 천태산을 찾아가 좌우산세를 살펴보고 터를 잡아 도술로써 지금의 운주사를 지었다고 한다.

*천불천탑의 유래(1)
최대감의 딸인 최처녀는 어느 날 이유 없이 옆구리로 아이를 낳게 된다. 아버지는 집안의 수치라 생각하고 아이를 버리는데, 비둘기가 아이를 보호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가 다시 데려다 키우게 되는데, 이 아이가 도선국사이다. 도선은 장성하여 도술로써 일봉암에 해를 쇠각에 걸어두고서 하루 동안에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불천탑의 유래(2)
운주도인이 국태민안을 위해서 천일기도를 드리는데, 마지막 기도를 마칠 때쯤 하늘에서 천동천녀가 내려와 돌과 흙으로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을 만들게 된다. 그 뒤 도인은 돌거북이로 화해 마을사람들에게 천불천탑을 구경시켜주었다. 이외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마구할머니가 돌을 옮겨다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천탑을 올릴 때
도승이 도술로 돌을 불러 모아 탑을 쌓아 가는데, 990탑을 쌓을 무렵에 닭이 울어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게 된다. 도암면 일대의 돌들이 앞을 쳐들고 있는 것은 운주사로 가다가 멈춰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 한다.

*운주사 창건 유래
중국은 조선의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혈을 끊어놓는다. 이를 안 도선국사가 천태산에 쇠방아를 만들어 중국을 향해 놓고서 한번 들었다 놓으면 그때마다 중국의 큰 인재가 죽었다. 중국에서 옥룡자인 도선국가가 한 것을 알고서 중지시켜 주면,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불천탑을 조성하는데,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다 와불이 일어나면 중국 곤륜산 정기를 다 받겠다 싶어 거기에서 멈추었다고 한다.

 

운주사 일주문

이 문을 들어서면 천불천탑의 신화를 간직한 운주사의 신비로운 석불과 석탑을 볼 수 있다.


*일봉암에 해를 붙들어 맨 마구할미
마구할미가 일봉암에 해를 묶어두고 천불천탑을 세웠는데, 천불천탑이 완성되었더라면 운주골이 서울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닭이 울자 걸어오던 바위들이 멈춰버렸다
도사가 술법으로 돌을 전부 끌어와 운주사를 짓고 있는데, 상좌가 거짓으로 닭 울음소리를 내자 운주사를 향해 오던 바위가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고 한다.


도선국사 탄생 설화

*도선설화(1)(2)
최대감의 딸이 배가 불러 동짓달에 옆구리를 트고 아이를 낳게 된다.(빨래터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딸이 아이를 산 속에 버리니 비둘기 떼가 나타나 아이를 보호한다. 그리하여 그 산을 구림(鳩林)이라 부르게 되었고, 아이 이름을 엄마의 성을 따라 최도선이라 부르게 되다. 도선은 중국으로 건너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한 뒤 보니, 조선에 자기보다 큰 인재가 낳을 것 같아 조선으로 와서 덕림산의 맥을 자르니 사흘 동안 피가 흘러 그곳을 일러 ‘피재’라 부른다. 마침내 도선이 조선을 망친 것을 깨닫고 무쇠바우를 만들어 무쇠바우를 한번 들었다가 놓을 때마다 중국의 인재가 죽었다고 한다. 도선은 바위 위에 옷을 벗어놓고 강으로 들어가면서, 바위의 색이 변하면 내가 죽은 것으로 알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바위의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와형석조여래불

[ 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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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소재 운주사에 있는 석조여래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유형시대성격소유자관리자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물
고려/고려
불상
운주사
운주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에 있는 고려시대 와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좌불 높이 12.7m, 입상 높이 10.26m. 운주사의 낮은 산등성이에 길게 누운 2구의 불상이라 와형석조여래불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왼편은 하반신을 마치 결가부좌한 다리처럼 만들어 좌불이라 하고, 오른편은 따로 다리를 나타내지 않아 입상으로 알려졌다. 넓적한 바위 암면을 다듬어 불상의 형태를 만들었으나 운주사의 다른 불상처럼 얼굴과 머리만 윤곽이 분명하고 신체는 장승처럼 처리했다.


우리나라에서 누운 모습의 불상은 유례가 드물기 때문에 일설에는 먼저 조각을 하고 일으켜 세우려다 실패하여 현재와 같이 누워있는 모습이 됐다고 전하지만 바위 모습으로 보면 처음부터 입상을 세우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넓은 암반에 불상을 조각한 것뿐이다. 심지어 운주사를 세운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천불 천탑을 다 만들려다가 첫닭이 우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와형불상을 세우려다가 실패하여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통상적으로 와불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처럼 똑바로 누운 모습의 불상을 와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와불은 부처의 열반 장면을 재현한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형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와불을 만드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운주사 와형불상 2구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두 구 모두 얼굴과 신체 형태가 유사하여 같은 시기, 같은 조각가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 얼굴은 아주 낮은 부조로 이목구비를 표현했는데, 눈, 코, 입을 개념적으로 나타내 장승처럼 보인다. 두 불상 모두 통상적인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옷 주름을 새겼다. 신체에 해당하는 바위 면에 그대로 두 손을 조각하여 입체감이나 사실성은 전혀 없으나 일반적인 불상처럼 수인을 나타내려고 했다. 어깨와 가슴은 좁고 빈약하며 인체의 굴곡도 없어서 더욱 장승이나 입인상(立人像)의 느낌을 준다. 지하에 묻힌 바위 상단을 다듬어 광배처럼 만들고 그보다 안쪽으로 다시 불상을 조각했는데 두 구의 불상 사이에 약간 깊은 골이 있어서 이 역시 바위의 원래 모양을 따라서 만든 것으로, 최대한 자연 암반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누워있는 모습의 불상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운주사 와불과 탑 설화

*닭이 울어 못세운 와불(1)

*닭이 울어 못세운 와불(2)

*상좌가 닭 울었다고 해서 실패

*닭이 울어 수도가 못되었다

*와불이 일어서면 서울이 된다
도선국사가 일봉암에 해를 묶어 두고서 천불천탑을 도술로 쌓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불을 깎아서 세우려던 찰나에 닭이 울어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천불천탑이 모두 완성되었더라면 이곳이 서울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명당탑

*명당탑의 도장. 파묘는 여자들만
운주사 뒤에 자리한 명당탑은 왕이 날 자리이며 범씨 터로 정했다 한다. 이를 안 사람들이 명당자리에 서로 묘를 쓰자 하늘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가뭄이 들면 여자들이 파묘를 하게 되면 꼭 비가 왔다고 한다.

*석불감실의 문짝
도선국사 마누라는 석불감실의 문 닫는 소리가 시끄러워, 그 문을 치마에 싸서 칠산 앞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범씨가 왕이 되면 7국 조공을 받는다
운주사에 묘를 쓰고 왕이 나면 칠산이 도읍이 되어 700년을 하게 되고, 칠국의 조공을 받는다고 한다.


운주사 주변 설화

*중장터 유래
도암의 중장터는 호남지방의 여러 명찰에서 수백 명의 스님들이 모여들어 물물교환 하는 장소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름날이면 일반사람도 많은 곡식과 돈꾸러미가 오고가는 장소였다. 중장터는 이조 중엽까지 존속하였다 하나 그 뒤 폐지되었고, 이곳을 중들이 장을 보았던 터라 하여 ‘중장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태산 철마
중국의 일행선사가 조선의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력으로 명산대혈의 영기를 모두 끊어버리고 있었다. 이를 안 도선국사는 쇠로 된 철마방아를 만들어서 당나라를 향하도록 안치해 놓은 다음, 매일 산에 올라 방아를 눌러 한번씩 찧자 중국의 큰 인물이 한명씩 죽게 된다. 도선이 일행선사에게 하루속히 우리의 산맥을 이어줄 것을 부탁하자, 일행선사는 도력으로 끊었던 모든 산맥을 이어주고 당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을 부탁하였다. 도선국사는 그 뒤로부터 철마방아를 없애고 반석 위에 철마만 두었다. 그러나 이 철마 머리가 향한 쪽의 마을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헤치는 흉사가 빈번히 일어나자 여러 곳의 마을사람들은 서로 다투어가며 철마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려놓은 소동을 벌였고 부녀자들은 엽전이나 쇠붙이 등을 철마 앞에 바쳐 마을에 호환이 없도록 빌었다. 철마에게 바쳤던 쇠붙이는 다음날 가보면 없어지자, 사람들은 쇠붙이를 먹는다 하여 ‘석철마'라 불렀다.

*수락산과 마고선녀
마고선은 수락산의 수려한 경치에 반해 달 밝은 밤이면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목욕 후 옥퉁소를 불고 있는데, 이를 엿보고 있던 머슴이 옥퉁소의 구슬픈 소리에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마고선은 그에게 연유를 묻자, 사십이 되어도 돈이 없어 장가가지 못한 처지를 토로하게 된다. 그러자 마고선은 병석에 누운 환자에게 흔들면 낳을 거라는 금방울을 주어, 머슴은 부자가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욕심 많은 소부자는 마고선이 목욕하는 곳을 찾아가 엿보았으나 오히려 색정을 느끼게 된다. 이를 안 마고선은 서둘러 옷을 입고 승천한 뒤 다시는 그곳으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발자취가 수락산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 후 나주고을에 퉁소를 잘 부는 기생이 소부자를 속여 골탕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자웅천과 부침천
천문과 지리에 통달한 대사가 세상 곳곳을 두루 살피면서 불쌍하고 몽매한 중생들을 자비와 인애로써 구원하고 있었다. 대사는 도암면에 와서도 마른 샘물에 물이 철철 넘치도록 했으며, 도암면의 흐르는 시냇물을 다도면으로 이끌어 가뭄에 타들어가는 벼에 물을 주고는 등 도력으로 마을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금오산전설
효성이 지극한 처녀가 샘가에서 용과 자라를 발견하게 된다. 그날 밤 처녀의 꿈에 용과 자라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 사람들 모르게 10년 동안 길러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부녀는 꿈대로 사람들 모르게 10년을 돌보자 용은 눈물을 흘리며 승천한다. 그 뒤 자라가 승천할 때를 기다리는데, 이때에 궁중에서 상감의 병이 깊어지자 금자라가 약이 된다 하여 백방으로 자라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녀가 살고 있는 집에 자라가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부녀의 집에까지 와서 자라를 잡아가게 된다. 금자라가 죽은 뒤 어느 날 자운선이 된 용과 백운선이 된 자라가 부녀 앞에 나타가 천도 두개를 바치고 사라진다. 그 뒤 부녀는 천도를 먹고 삼백년의 영화를 누리고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미륵골 유래
화순 동면으로 가는 도로변에 미륵골이 있는데, 옛날 조담선사가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조담선사는 부처님 조성할 석재를 구하려 여러 곳을 찾다 제일 높은 명산인 서석산 즉 무등산 상봉으로 찾아가, 도력으로 돌을 흡사 목재를 절단하여 다듬듯 하여 그 중 가장 크고 높은 돌을 골라 도력으로 하루 밤에 이곳까지 옮겨 놓았다. 지금의 입석과 서석은 그때 조담선사께서 고르다 버려둔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절은 연곡사라 하여 이름도 높았고, 마을사람들의 기도 도량이 되어 신통한 영험을 미륵불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륵불이 보이는 마을에는 역귀가 찾아들어 전염병으로 마을을 망칠뿐만 아니라 부녀자는 음탕하여 가문에 망신살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나돌아 마을 장정들이 합심하여 미륵불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 뒤 절에는 빈대가 들끓고 호랑이가 나타나는 등 괴이한 일이 끊이지 않자 스님들이 점차 살 수 없게 되어, 연곡사는 없어지고 미륵불만 누어있게 되었다고 한다.

욕망은 털어버리고 순수함만 남긴

이미지 크게보기 운주사 입구 돌부처

천불천탑,,?

역사는 흘러오고 흘러간다. 역사는 뒤안길을 기록이나 유물로 남겨 사연을 후세에 전한다. 운주사(雲住寺), 천불천탑으로 인구에 회자하는 한국미술사의 풍운아다. 고려(918~1392년)에 창건되었다고 보이는 10~11세기의 청자 파편과 기와, 금동여래입상 같은 출토유물 몇 점과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짤막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여기에 현존하는 20여 기의 석탑과 80여 기의 석불이 전부인 운주사는 오늘도 화순, 그 잔잔한 시골 평범한 산자락 가운데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는 산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어 소나무 뿌리가 겨우 한 줌 흙에 붙어 있을 정도로 수목이 척박하다. 나무가 없으니 물이 귀하여 계곡이 없다. 산수를 인체에 비유하면 바위는 뼈가 되고 흙은 살이 되며, 수목은 모발이 되고 물은 피가 되며 연운은 정신이 된다 하였다. 이런 논리라면 운주사는 골기가 강하여 뼈가 살 밖에 삐죽 솟아난 형상이다. 부드럽거나 따듯한 맛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거친 양기만 가득한 절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운주(雲住),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팍팍한 자연에 구름과 안개를 드리워 정신적으로나마 푸근하게 고양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운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10.7m. 보물 제796호. 거대한 암반 위에 별도의 지대석이 없이 암반 자체에다 3, 4단의 굄대를 각출하고, 그 위에 기단부 면석을 올렸다. 운주사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높다.


운주사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변에는 깊은 계곡이나 높은 봉우리 하나 없다. 그저 평범한 전라도 산천이다. 근년에 신축한 대웅전 뒷산 중턱에 알같이 박힌 큰 바위에 올라 내려다보면, 운주사는 골짜기를 따라 물길이 거슬러 오르듯 터가 배처럼 길쭉하다. 그 사이에 좁은 계곡과 골자기에 석탑과 석상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천불천탑은 수많은 불탑과 불상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꼭 집어 각각 1,000개씩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운운하면 나라 전체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외지고 궁벽해서 평범하기조차 한 이곳에 이렇게 많은 탑과 불상을 세운 연유를 알 길 없다.

고려 당시 몽고의 침입을 팔만대장경판을 조성하여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처럼, 천불천탑을 조성하여 국난을 이겨보겠다는 의미라고 추측해 보아도 무리가 있다. 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과 운주사의 중심 법당처럼 보이는 보물 797호 석불감쌍배불좌상에 보이는 두 부처를 앞뒤로 모셔 음양을 나타내는 밀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창건 기록과 설립 목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수이다.

추측건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국가에서 지원하는 재정과 기술에 기대지 않고 불심 가득한 지방 토호의 재원으로 불심과 순수로 뭉친 장인들과 서민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는 칠성신앙 같은 토착적 샤머니즘도 일조하였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유적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미감을 계승·발전시키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이고 순수한 미감으로 정성을 다해 탑을 쌓고 무심하게 돌을 다듬어 불상과 석탑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 결과 탑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원의 의미로 높이 쌓아 7층 혹은 9층으로 쌓고, 불상은 잘 만들기보다는 많은 형상을 통해 불심을 모으는 일종의 상징으로 조성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운주사 계곡 듬성듬성 자리한 빛바랜 석탑과 석불의 고졸한 아름다움이 가을 햇살에 빛난다.

운주사 석물들은 하나같이 못생기고 어설프다. 불상은 대체로 서 있는 자세에 자연 기단 위에 올려져 있다. 주변의 바위를 쪼개어 얇은 석재를 홀쭉하게 세우고 단순하게 조각하였다. 일본 법륭사 정창원에 소장된 ‘백제목조관세음보살입상’의 유려한 자태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석질도 부드러워 풍화가 심하고 닳아 떨어져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종교적 모습이라기보다는 고대 조각을 보는 듯 단순함과 생략이 가득하다. 고졸미가 넘친다. 불상은 모두 비바람에 씻기고 닳아서 형태는 삭았지만 어렴풋한 모습이 인간적이다.

특히 절 입구 자연 기단에 쌓은 높직한 9층석탑을 지나 오른쪽 얕은 바위 아래 서 있는 입석불상은 현대미술의 거장을 보는 듯 새롭다. 늘씬한 몸매에 추상적인 옷자락과 수인(手印) 그리고 형태가 거의 사라지고 기다란 코만 남은 둥글고 긴 얼굴, 거친 인상을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용모는 현대 조각가 브랑쿠시의 조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느낌은 영락없이 백제 양식이다.

대부분 7층이나 9층으로 이루어진 운주사 석탑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이나 신라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보이는 탁월한 체감율의 비례미는 찾아볼 수 없다. 옥개석도 신라의 전탑이나 백제의 목조양식의 전형에서 벗어나 처음 보는 둥근 모양이 낯설고 어설프다. 탑신은 X자형의 기하학적인 도상이나 꽃잎 모양의 이국적 모양이 언뜻 눈에 안 든다. 잘생긴 신라 석탑을 보다가 운주사 석탑의 길쭉하고 못생긴 다층 석탑을 보다 보면 꼭 유치한 어린아이들 탑 쌓기 놀이를 보는 듯하다.

그래도 즐겁다. 보는 맛이 난다. 아이디어나 영감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다. 수수께기 같기도 하고 보물찾기 놀이 같기도 하다. 유치해서 더 좋다. 이런 ‘유치찬란’ 석탑들은 바위언덕이나 평지 가운데 담담히 자연의 일부가 되어 천년을 눈과 비 맞고 바람과 구름이 스쳐 지나갔다.

운주사 석탑과 석조 불감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천진무구한 경지의 탑과 불상들이다. 불감 아래 등을 마주한 부처님이 천 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도넛 같은 탑도 눈에 언 듯 안 들어오지만 역시 탑이다.

고려는 불교를 통치 철학으로 삼고 귀족 정치를 펼치며 무인이 득세하여 귀족적 취향의 화려함과 장식성이 돋보이는 완벽주의 미감의 시대이다. 몽고항쟁의 대명사격인 ‘팔만대장경’의 완벽에 가까운 목판 기술과 경전 내용의 완성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고려 청자의 신기에 가까운 비취색과 고려 자기의 빼어난 조형미, 고려 불화의 경이적인 불화 기술과 채색법, 은입사 칠함 같은 고려 금속공예술 등 조형 전반에 걸쳐 고려시대 미감의 현란한 기술과 화려한 외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고려 시대 유물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무인 취향이다. 몽고의 침입과 중국문화의 영향 그리고 귀족 국가로서의 불교적 화려함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화순 운주사 11호 석불

화순 운주사 11호 석불화순 운주사 11호 석불. 1919년 촬영


미술과 공예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둥·주심포 건물들의 완벽한 치목과 결구의 장엄함이라든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천사지 팔각9층탑’같이 조각에서 보이는 라마교풍의 장식적 화려함이 극에 달하여 현기증이 난다. 이는 고려시대 전반을 풍미하는 시대미감이다.

이에 비하면 운주사 석물들은 너무 조촐하고 소박하다. 마치 조선 말기 퇴락한 유교의 자연주의 미술품을 보는 듯하다. 어떻게 고려시대에 저리도 장식의 미니멀과 맥시멀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내었을까? 운주사 경내를 온종일 보고 또 보고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생각을 곰곰이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실, 고려는 몽고의 70년 지배하에 있는 동안 몽고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미 언급했지만 한국탑의 정형은 3층석탑으로, 8세기 통일시대를 정점으로 미감의 완결을 보았다. 그런데 운주사 탑같이 기단이 좁고 층고가 높은 다층 석탑은 통일신라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월정사 9층탑이나 마곡사 9층탑에서 보이는 원나라 양식의 영향이다. 그뿐 아니라 문양도 어설프고 둥글고 평편한 형태부터 항아리를 포개놓은 것 같은 다양한 옥개석도 있다. 이는 따지고 보면 운주사 석물을 건립하는 데 미감을 감독하는 감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장인들 스스로 자율적 의지의 소산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욕망은 사라지고 순수함만 남은 소박한 미감의 경지이다.


‘다정부처’와 칠성바위

운주사의 백미는 탑도 불감도 아닌 대웅전 서편 언덕받이에 위치한 누운 부처(臥佛) 한 쌍이다. 부처라기보다는 부부 같은 ‘다정부처’이다. 너럭바위를 있는 그대로 적당히 다듬어 몸통을 만들고 가운데 자연스럽게 갈라진 틈을 나누어 두 부처의 얼굴을 새겼다. 얼굴은 운주사 어느 곳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긴 코에 얕게 패인 눈, 얇은 입술, 꼭 다문 입 등 어느 하나도 새로울 것 없다. 와불의 크기는 길이 20여 미터, 폭 6~7미터에 달하지만 위엄과 기상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들이 소풍 와서 배 위를 구르거나 얼굴을 쓸어내려도 말없이 천년을 그대로 누워 있다.


화순 운주사 부부와불

화순 운주사 부부와불


황지우의 시 「산경(山經)을 덮으면서」에서 “적설 20센티미터/얼음 이불 되어/불 부부의 더 추운 동침을 덮어 놓았네/쇼크로 까무라진 듯/15도 경사로 누워 있는 부처님들/석안(石眼)에 괸, 한 됫박 녹은 눈물을/사람 손으로 쓸어내었네”라고 적었듯 ‘다정부처’의 얼굴엔 다정함이 가득 배어 있다. 부처의 고행과 종교의 신성은 그곳엔 없었다. 이 불상을 조성한 고려인의 당시 성정이 이처럼 어질고 순했나 보다. 어느 고고한 예술품보다 멋진 걸작이다.

운주사 와불(臥佛)

계곡 서편 언덕바지 솔숲 암반을 다듬어 만든 누운 ‘다정부처.’ 한 쌍의 부부처럼 크기도 조화롭고 상호도 다정하다. 단순한 조각이 더욱 인간적이어서 볼수록 마음이 편안하다.

운주사에는 칠성바위가 있다. 와불에서 아래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 석탑 1기와 널찍하고 둥근 바위가 주사위놀이라도 하듯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원형의 잘 다듬어진 바위는 크기는 다르지만, 분명히 북두칠성 형상 그대로의 칠성바위가 놓여 있다. 둥근 상판이 지면에 닿지 않고 울퉁불퉁 솟아 있는 것은 나무뿌리가 바위를 들고 일으켜 세웠거나 오랜 세월 빗물에 흙이 쓸려나가 바위에 노출되어 자연스럽게 놓인 것이다.

이 칠성바위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칠성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칠성신앙은 비를 내려 풍년을 이루게 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며, 재물을 준다는 현세적 기복(祈福)신앙이다. 이러한 칠성신앙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음력 7월 7일 즉 칠석(七夕)이 우리에게는 단순히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에서 만나 하루 동안 못 다한 사랑을 나누는 동화적인 상상에 불과하지만 불교에서는 연중 큰 행사이다.

칠성바위의 무심한 둥근 조형이 하나의 현대 조각이다. 최첨단 건축과 공간에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아름답게 어울릴 것이다. 미감은 세월과 장소,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다. 반듯하게 솟은 탑과 뒹구는 원형 칠성바위가 어울려 자연의 설치미술이 운주사의 고요함을 흔든다. 구름이 운주사 앞산을 스쳐지나 건너산 중턱에 세워진 석탑 한기가 언뜻 보일 듯 말듯 신비로운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운주사 칠성바위.

둥근 바위 일곱 개가 앙상한 소나무 사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다. 토속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융화되어 나타난 전형이다.

운주사는 해가 쨍쨍한 가을 한낮보다는 봄 안개에 버들가지 물이 촉촉이 오르는 봄 새벽이 더 정답고, 뻐꾸기 우는 6월 장맛비 내리다 잠깐 그친 앞 산마루에 구름이 걸친 여름 오후나 혹은 종일 함박눈이라도 펄펄 내리는 따뜻한 겨울의 한낮 정취가 더 어울릴 것이다.

운주사 입구 세월의 흔적을 알려주는 고목 한 그루 없이 팍팍한 가을바람만 분다. 가을 오후 해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나서야 신작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절을 빠져나왔다. 아침 절에 오를 때 보았던, 아직 단청이 채 마르지 않은 일주문 옆 사시나무 한 그루가 마른 가을 바람에 가늘게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기부처

“운주사에는 30센티미터 안팎의 자그마한 돌부처 3구가 조사되었는데 무슨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얼굴 표정이 토우같다.” 이태호, 천득염, 황호균이 함께 쓴 <운주사>라는 책을 보면 위의 글과 함께 못생긴 돌부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돌부처는 매우 질박하게 조각된 탓에 동화적 세계라고 하는 대중적 순박함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괴한 형상으로 추상화되어 있는 까닭에 필자에게 불온한 상상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이런 돌부처의 추상적인 형상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인물

아비: 40대. 아들의 미소를 찾기 위해 신령님께 자신의 사지를 잘라 받치면서 돌부처를 만드는 기인.
어미: 30대. 역시 아들의 미소를 찾기 위해 돌부처에서 나온 돌 부스러기를 갈아서 먹는 기인.


먼 옛날 이야기다. 전시에 불에 탄 후로 황폐화된 운주사 터에서 중년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움막을 짓고 살고 있다. 운주사는 예부터 아들 출산을 바라는 여성이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 와 불상 코를 깨트려 갈아서 먹는다거나 불상을 모셔놓고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가 전해왔는데, 이 부부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제 막 얻은 아들의 건강을 위해서 운주사를 찾은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새로 등극한 임금이 나라의 장애자를 색출해 몰살시킨다고 포고령을 발표한 것이다. 이 부부는 늦게 얻은 아들이 돌이 다 되도록 웃지를 않자 장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치성을 들여 불상을 제작하면 좋아질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운주사를 찾은 것이었다. 이 부부는 합심하여 아기부처님을 조각하는데 처절하게 치성을 드린다.

극은 아비가 돌부처를 완성하기 직전에 시작된다. 이 부부는 지능이 보통사람보다 낮은 편인데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보통사람을 능가한다. 아비는 불상을 제작하는 과정에 자신의 사지를 잘라 신령님께 바치고, 어미는 아비가 조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돌가루를 갈아서 밥대신 먹는다. 지능이 떨어져 이런 기행을 하겠지만 아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이 부부를 극단적으로 살게 한 것이다.

다음날 마침내 아비는 불상 제작을 마치는데 거짓말처럼 아이가 웃기 시작한다. 아비는 자신의 치성 덕분에 아이가 치료됐다는 생각에 급히 움막에 가 아이를 보려 하나 이미 발가락을 절단한 후라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움막에서 누워 지내던 어미가 힘겹게 아비에게 다가와 웃는 아이를 건넨다. 어미는 아비가 제작해 놓은 불상의 매력에 빠져 무리하게 안으려다가 그만 하반신 불수가 되는 중상을 입게 된다. 오랫동안 밥대신 돌가루를 먹어 영양실조에 걸린 어미가 무리하게 힘을 쓴 결과 하반신 뼈가 모두 골절된 것이다.

이렇듯 부부가 처절하게 몸을 바쳤건만 어미가 불상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에 아이는 그만 웃음을 그치고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이의 변화에 실의에 빠진 아비가 분을 못 삭이고 어미를 살해하면 막이 내린다.


천년의 자리

작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운주사,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이 있다고 전해지는 신비의 사찰. 그 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해지는‘부부와불’은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 가지 설화만 전해온다. 이번 <천년의 자리>는 운주사의 많은 설화 중에서 와불이 일어나면 민중세상이 도래한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인물
바우 ( 18세의 청년, 석수장이의 아들)
- 바우아범 (45. 석수장이)
- 달래 (18. 바우가 사랑하는 여자)
- 승려 (나이추측 미상)
- 달래 母
- 호장(戶長)
- 천석(20. 호장의 솔거노비)
- 오월 (18. 호장의 몸종)
- 사신(使臣)
그 외 춤을 추는 미륵들, 군졸들 (일품군의 병사들), 마을 사람들
일꾼들, 중국사람.


고려 초, 화순의 천불산.
대대로 석수장이 일을 하는 바우아범. 그 업을 이어받기 거부하는 바우. 바우는 풀피리를 불며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는 승려의 말대로 오늘도 불상과 탑을 만들고 있다. 불상은 투박하고 못생긴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을 닮은 부처들인 것이다.

바우는 인근 영산포에서 뱃일을 하며 아버지 곁을 떠날 생각만 몰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우를 붙잡기 위해 승려의 조언대로 달래와 혼사를 약조한다. 바우는 뛸 듯이 기뻐한다. 어느 날, 달래가 원의 조공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역의 유지격인 호장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다.

바우와 달래는 산속으로 도망을 친다. 그들은 정안수를 떠놓고 둘만의 혼례를 치른다. 토굴과 같은 곳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불타오른다. 다음 날, 승려가 찾아와 바우와 달래에게 세상과 연을 끊고 멀리 떠날 것을 당부한다. 승려의 뒤를 밟은 호장의 솔거노비 천석은 달래가 돌아오지 않으면, 두 집안이 몰락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고 사라진다.

결국 달래는 눈물을 머금고 원나라의 조공으로 끌려가게 된다. 떠나기 전날 호장은 어차피 달래가 버릴 몸이라며 겁탈을 한다. 바우아범은 정토세상을 염원하며 바위를 쪼개고, 승려는 한스러운 세상을 한탄한다. 원의로 떠나는 조공들 속에 달래가 보인다. 바우는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돌부처를 달래에게 징표로 건넨다. 달래母는 절규를 한다.

그 후 시간은 흘렀다. 바우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석수장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거대한 부부와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바우는 여전히 달래는 그리워하는데, 무대 한쪽에 달래의 환형이 나타난다. 그러나 행복한 모습은 아니다. 바우아범은 늙고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는 형상이다. 들어온 승려는 바우에게 달래母의 무덤이 멧돼지에 의해 파헤쳐졌다며 날이 풀리면 손을 볼 것을 알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한편 천석은 호장의 딸 입분이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 천석은 호장이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 입분을 껴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천석은 그간 자신이 호장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입분을 데리고 도망친다.

호장은 입분이 죽은 이유가 바우아범이 조상의 비를 잘못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석수장이 부자를 잡아올 것을 명한다. 아울러 도망친 노비 천석과 입분도 함께 잡아오라고 지시한다. 도망치던 천석 부부와불을 만들고 있는 바우에게 도망칠 것을 알린다. 이 순간 바우아범은 어느새 열반에 든 것이다.

바우는 천석에게 영산포구에 가면 관에서도 모르는 배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가락지를 빼서 배 삯으로 보태라며 건네준다. 천석은 바우에게 그간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떠난다. 바우 드디어 부부와불을 완성했다. 그러나 밀어닥친 군졸들에 의해 바우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잠시 무대에는 달래와, 바우아범이 만들어 놓은 불상들의 춤이 이어진다. 이어서 죽은 바우의 영혼이 깨어나 군무가 되고, 천석과 입분 그리고 마을사람들까지 어우러지는 거대한 춤판으로 형상화된다.


석불 순례길

와불을 찾아 신화 속으로

운주사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돌부처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 세기 전만해도 운주사의 돌부처와 석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한 점 돌부처가 되어 이 가람에 들어앉은 듯 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절을 헤쳐 오면서 돌부처와 석탑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더러는 집을 지을 때 기둥 고임돌로 쓰였다. 누군가 죽으면 무덤 앞에 상돌로 쓰기 위해 가져갔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쌓는 축석으로 쓰인 것도 지천이다.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이 돌부처와 석탑에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발에 채이고 널린 게 돌부처이고, 석탑이었으니 그 중 몇 개 가져간다고 문제될 게 아니던 시절이었다. 


그 험한 시절까지도 견디고 남은 돌부처와 석탑이 지금 운주사에 있는 것들이다. 천불산에서 가지 쳐 나간 두 개의 산줄기가 만든 길고 비좁은 계곡을 따라 돌부처와 석탑이 서 있다. 더러는 제 힘으로 설 수 없어 바위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더러는 무거운 몸을 주체하지 못해 아직도 누워 있다. 뿐만 아니다. 아직도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계곡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 돌부처도 지천일 것이다. 그만큼 이 절에는 돌부처와 석탑이 많다. 운주사에는 지금 탑 19기, 돌부처 93구가 전해진다. 일제 때만 해도 지금보다 2배나 많았다고 한다.

시간의 강을 건너며 얼굴 잃은 돌부처들

운주사의 돌부처는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천년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얼굴이 지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분명 눈과 코와 입을 새겨 넣었을 테지만 남아 있는 돌부처는 어렴풋한 형체만 존재한다. 어떤 것은 가사와 몸체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얼굴이 지워진 것들이다. 누군가 일부러 얼굴을 지워버렸거나 세월이 할퀴고 간 것이다. 얼굴 없는 돌부처들. 시간이란 긴 강을 건너오면서 상처받고 할퀴어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돌부처들. 바로 이 돌부처가 있어 사람들은 운주사를 찾을 때마다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돌부처는 바라보는 이들 자신일 수 있다. 이 돌부처를 새긴 이들은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돌에 조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운주사의 돌부처와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돌부처가 민초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고압적이거나 높은 곳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비록 형태는 지워졌지만 이 땅에 살아왔던 농투성이들처럼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민중의 심성을 가진 돌부처는 결코 한국인에만 감흥을 준 게 아니다. 20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몇 해 전 운주사를 찾았다가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고  를 남겼다.


운주사는 가람 배치가 빼어난 절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지도 않다. 산세가 절경이거나 깊고 그윽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운주사의 저력은 무수한 석불과 석탑에 깃든 설화에서 나온다. 운주사를 창건한 이는 풍수지리의 뼈대를 세운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로 알려졌다. 도선은 한반도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국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배는 중심이 동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는 백두대간에서 가지 쳐 나간 낙동정맥이란 큰 산줄기 탓이다. 따라서 서쪽에도 무거운 것을 만들어 균형을 맞춰줘야 했다. 그래서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천불천탑의 신화를 간직한 운주사는 항상 신비감이 감돈다.
도대체 언제 누가 왜 이렇게 많은 석불과 석탑을 조성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안고 석불순례를 하게 된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는 와불에 있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는 높이 12m, 폭 10m에 이르는 와불이 있다. 이 와불은 혼자가 아니다. 좌상과 입상을 한 돌부처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와불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다. 그것도 산등성이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의 와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독특한 와불에 소설가 황석영은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의 활약을 다룬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이다. 그러나 와불은 도선국사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에 싫증을 느낀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아 울었다고 고해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돌아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일주문에서 절에 이르는 길 주변의 돌부처와 석탑이다. 또 하나는 절집에서 오른쪽 천불산을 올라 공사바위에서 운주사를 내려다본다. 마무리로 절집에서 왼쪽의 능선으로 올라 와불과 석불군 라, 칠성바위를 아우른다. 이렇게 돌아보는 데는 1시간 30분쯤 걸린다. 그러나 석불 하나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시간은 한없이 길어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선 대웅전을 향해 창처럼 도열한 탑들이 반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비례와 균형미가 넘치는 탑은 아니다. 키가 껑충하게 큰 편이다. 높이는 7m를 헤아린다. 3기의 석탑 뒤로는 돌집을 지어 앞뒤로 석불을 모신 탑도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석불군이 도열해 있다. 바위들이 지붕돌처럼 파여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한두 기의 돌부처가 서 있다. 돌부처가 바위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산비탈 위에도 석탑이 솟아 있기도 하다.


절집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다. 현대에 들어 복원불사를 한 당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석탑이 볼거리다. 탑보다도 탑 주변에 놓인 돌들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돌들은 한때 돌부처였거나 석탑이었던 것들이다. 분명 돌무처의 얼굴이었던 것임에도 그저 한갓 돌무덤으로 존재한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석불군마가 있다. 얼굴은 형체가 없이 지워졌지만 가사와 몸은 온전히 보존된 석불을 중심으로 몇 기의 돌부처가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 앞으로는 기단 모양이 독특한 탑이 있다. 보통 탑의 옥개석은 팔작지붕처럼 들려 있는데 반해 이것은 복숭아처럼 동글다. 어디 이것뿐이랴. 운주사에 있는 석탑 가운데는 옥개석을 호떡처럼 둥글게 깎아 올려놓은 것들도 많다. 딱히 무엇이라 단언할 수 없는, 질서와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양식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운주사의 석탑들이다.


석불군 마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두 기의 석탑이 있다. 오른편에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데크 위에 마애불이 있다.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애불이다. 워낙 마모가 심한데다 짙푸른 이끼까지 잔뜩 끼어 있어 눈에 힘을 주지 않고는 구별하기 힘들다. 그래도 얼굴의 윤곽은 분명히 남아 있다.


마애불에서 두어 걸음이면 공사바위에 닿는다. 이 바위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를 감독하던 자리라고 한다. 공사바위에 서면 절에서 일주문을 향해 늘어선 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최근에 난 산불로 흉하게 타버린 나무들의 모습도 보인다. 검게 타죽은 나무들은 죽어서도 스러지지 않은 채 남아 고통의 시간을 증거한다.

신화 속에 잠들어 있는 와불.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돌부처는 부처가 아닌, 이 땅에 살다간 농투성이의 자화상, 다시 절집으로 돌아와 맞은편 능선을 오르면 2기의 탑이 서 있다. 역시, 길쭉하게 키만 크고 안정감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석탑들이다. 이 석탑이 놓인 커다란 마당바위 아래에도 석불군 라가 있다. 이곳에도 가사와 몸이 생생한 석불을 중심으로 크기가 제각각인 돌부처 10여기가 서 있다.


와불은 능선의 꼭대기에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와불을 돌아보며 ‘일어설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본다. 가로로 길게 누운 탓에 바라보는 이들도 목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와불과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잠시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와불 밑에는 원형으로 깎아 놓은 7개의 바위가 있다. 큰 것은 지름이 3m 가까이 된다. 칠성바위라 불리는 이 돌들은 북두칠성을 본 떠 만든 것이라 한다. 혹은 이 원형으로 깎은 바위를 옥계석으로 쌓았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어느 것도 정답이라 단정 지어 말 할 수 없다. 운주사 자체가 미궁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석불 순례를 마칠 때쯤이면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많은 돌부처와 탑을 조성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시의 기술로는 일으켜 세울 수도 없는 와불을 비롯해 형식과 틀을 무시한 탑과 석불의 파격미는 궁금증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준다.

돌부처는 말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바위에 기대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전부다. 혹여 그 대답은 와불이 간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전설처럼, 새 세상이 열리는 날 와불이 벌떡 일어서서 이 산에 천불천탑을 조성한 연유를 털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석불군

일주문을 지나 처음 만나게 되는 석불군. 둘부처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

 

석불군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공사바위 가는 길의 석불군. 운주사를 거닐다보면 숲속이나 바위틈에서 지긋한 눈길을 건네는 돌부처와 마주하게 된다.

돌부처

공사바위로 가는 길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돌부처. 이 석불은 얼굴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등 ‘불구’가 대부분인 운주사의 석불 가운데는 그나마 온전하게 보존됐다.

마애불

운주사의 유일한 마애불.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해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다.

석탑

와불 앞의 거대한 바위에 세워진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앞)과 거북바위 오층석탑. 와불을 지키는 장수처럼 우뚝하다.

거북바위에 세워진 교차문 칠층석탑을 사진에 담고 있다.

운주사는 특별한 탑과 석불이 많아 사진 동호인들의 단골 출사지다.

칠성바위

보름달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놓여 있는 칠성바위. 둥근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을 본 떠 만들었다고 해서 칠성바위란 이름을 얻었다

칠층석탑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바위를 기단석으로 활용해 세웠다.


화순 운주사 와형 석조여래불.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운주사지 계곡 정상부에 있는 석불2구로 각각 12.7m, 10.3m의 크기로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누워있는 형태이다. 운주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천불 천탑을 세운 후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새벽닭이 울어 누워있는 형태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국내의 와불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석불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화순운주사 와 형석조여래불 (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화순운주사 와 형석조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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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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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3
전라남도 화순군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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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순운주사와형석조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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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편 민중의 희망을 담다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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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소재 운주사에 있는 석조여래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운주사에 있는 석조여래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화순 운주사 와형 석조여래불

운주사에 있는 석조여래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석불군. 거북바위 아래 모셔진 석불군. 10여기의 돌부처가 바위를 지붕 삼아 자리했다.

돌탑

운주사 산신각 앞에 세워 놓은 자그마한 돌탑. 본래 제짝은 따로 있겠지만 무너져 나뒹구는 것을 모아서 저처럼 작은 돌탑을 만들었다.

석탑

운주사 대웅전 앞마당의 석등 곁에 세워놓은 조그만 석탑. 옥계석과 받침돌을 뒤엉켜 쌓아놓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탑이다.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운주사는 특이하고도 신비로운 절이에요. 절에 울타리도 문도 따로 없고, 사천왕도 없이 골짜기를 따라서 탑과 불상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다시 중건되었읍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2기의 석탑과 70여 기의 불상만 남아 있다. 사람들이 이곳의 탑과 불상을 가져다가 집을 짓거나 축대를 만드는 데 쓰기도 하고,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은 다른 절에 있는 불상이나 탑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모습. 불상에서는 부처님의 위엄이나 엄숙함을 찾아볼 수 없어요. 또한 정교하고 세밀한 장인의 솜씨도 찾을 수 없읍니다. 수십 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불상부터 12m에 이르는 다양한 돌부처들이 대부분 코만 도드라져 있고, 입과 눈 등은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어요. 곳곳에 아무렇게나 서 있는 불상들은 높은 곳에 있는 다양한 크기의 부처가 아니라 마치 낮은 땅에서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읍니다.

운주사의 탑들도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해요. 또 탑에는 다른 절의 탑에서는 볼 수 없는 ‘ ?, X, V ’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 운주사의 창건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다.


“경상도 쪽에는 산이 많지만 전라도 쪽에는 산이 적다. 두 지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전라도 지방에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을 세워야 해! 그래야 나라가 편안해질 거야. ”


도선국사는 도술을 써서 하루 만에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 사실과는 맞지 않읍니다. 도선국사가 살았던 시대와 운주사의 탑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몇 백 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운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10.7m. 보물 제796호. 거대한 암반 위에 별도의 지대석이 없이 암반 자체에다 3, 4단의 굄대를 각출하고, 그 위에 기단부 면석을 올렸다. 운주사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높다.


운주사의 석탑들

운주사의 불상들

운주사의 못난이 불상들과 탑들에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어요. 운주사 뒤에는 거대한 불상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데 새로운 세상을 바랐던 사람들은 그 불상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 불상이 일어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출처 : 참고 자료.

운주사 - 욕망은 털어버리고 순수함만 남긴 (한국의 미 산책, 2007..,)

무대극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운주사),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운주사 석불 순례길 - 와불을 찾아 신화 속으로 (길숲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doopedia.co.kr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화순운주사와형석조여래불 [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두산백과)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 있었던 운주사 (지도로 배우는 우리나라 우리고장 - 충청 · 전라 · 제주, 2009..,)

운주사 - 아늑한 산사에 석불과 둘러앉기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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