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각 정치, 사회이슈,,, 국 내외,

실미도,

실미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의 면적 7만 5870평, 둘레 6㎞의 작은 섬으로 무인도이다. 인천광역시에서 남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져 있으며,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바로 아래쪽 무의도와는 하루 두 번 썰물 때 갯벌로 이어진다. 섬 대개가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은 모래와 개펄이 뒤섞여 있다.

북파 공작부대로 계획되었던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의 훈련장으로 유명하다. 현재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며, 실제로 촬영도 여기서 진행되었으나, 크랭크업 이후 촬영지를 해체해서 현재는 갈대밭에 촬영지였다는 팻말만 있다. 관광지를스스로 포기했다,

흔히 '실미도 부대'라고 부르는 684 부대(1968.4 - 1971.8)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목적의 비밀부대였다. 684 부대는 1968년에 일어난 1·21 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같은 해 4월에 창설되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1971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지자 같은 해 8월 23일 감시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하여 실미도 사건을 일으켰다.

실미해수욕장이 바로 옆에 있으며, 실미해수욕장을 통해서 실미도로 들어갈 수 있다.

 

실미도사건

實尾島事件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시대/ 발생/ 성격/ 유형/ 종결분야관련/ 인물/단체관련 장소

현대

1971년 8월 23일 06시

사건

1971년 8월 23일 14시 15분

정치·법제/국방

실미도 부대, 중앙정보부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6 유한양행

1971년 8월 23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1968년 ‘1·21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3년 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 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28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사태’ 후 정부의 대북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대북특수공작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경과

1968년 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 지시’로 「공본작전비 제91호(1968.4.1)」에 근거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는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3년 4개월간 특수공작훈련을 받았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본래 ‘특수공작 기본계획서’에 의해 사형수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법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민간인으로 대체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예산지원과 정기적인 훈련 상태 점검을 담당하였고, 공군이 부대 운영과 훈련을 책임졌다.

실미도 사건은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및 보수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천에서 육군과 최초의 총격전을 벌인 후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오후 2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저지하는 군·경과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결과

군·경과 실미도 공작원들과의 교전 결과,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그리고 공작원 20명이 사망하고, 생존 공작원 4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 집행되었다.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소설


실미도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1999년 백동호가 집필한 자전소설이다. 금고털이로 수감된 백동호(소설의 주인공)가 감옥안에서 684부대 출신인 강인찬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미도 사건만을 다룬 영화와 달리 실미도 사건 반, 백동호의 일대기 반이 주가되어 있다.

 

소설의 영화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영화 실미도가 제작 되기도 한다. 2000년 김호성 감독이 제작하기로 하고 제작발표회까지 했으나, 촬영이 취소되고 이후에도 몇차레 취소를 거듭하다가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다만 실제로는 30% 정도만 소설을 반영하였고 나머지는 영화 독자적인 시나리오대로 전개되었고 타이틀에서도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강인찬'인 점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설정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칼잡이'였다는 정도. 그것도 소설에서는 정식 검도사범이지만 영화에서는 조폭 행동대장으로 바뀌었다. 영화에서 강인찬의 월북한 아버지의 직업이 검도사범인 점이 원작을 반영한것 같다. 원작 소설에서 강인찬의 아버지는 그저 병에 걸린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또한 실미도 탈출 이후의 행적도 판이하게 다른데, 영화에서는 주도적으로 부대원을 이끌고 청와대로 향하다가 자폭으로 사망하지만, 소설에서는 개인적 복수를 위해 혼자서 행동한다.

 

공작원 생존자는 있는가?

 소설가는 2명의 공작원 생존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공작원들은 모두 수류탄 자폭 혹은 이후 체포 후 사형 집행으로 전부 사망 처리되었다. [1] 하지만 백동호 작가는 공작원들이 섬을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3명의 이탈자가 있고 이들중 1명을 직접 만난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 부분은 소설 실미도를 만화화한 박인권 화백의 지옥의 실미도에 잘 나와있다. 언론 등에서 공작원 생존자의 인증을 요구하자 생존자중 1인은 현재 외국에 있으며, 사회의 시선 때문에 나올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출처필요] 실미도 영화화 때 했던 인터뷰에서는 지금은 강인찬의 모델이었던 병사와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관련 문서

수류탄 자폭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6명인데 모두 중상을 입어서 상태가 심각했던 2명은 후송 중 사망했고 결국 4명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4명을 통해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고 얼굴이나 이름표를 통한 확인이 어려운 경우 전투화에 쓰인 이름을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전원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다 죽이고 억울함 알리자"..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②탈출 D-Day, 날이 밝다

“3년 4개월 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 다 죽이고 서울로 가서 억울함을 알리자.”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인천의 무인도인 실미도. 해변에서 멀지 않은 가건물의 막사 안으로 여명이 비쳤다. 기간병들의 간단한 점호가 끝나자 공작원 2명이 발소리를 죽인 채 교육대장실로 숨어들었다. 군복을 챙겨입던 교육대장은 공작원이 휘두른 망치를 맞고 즉사했다. 공작원 둘은 카빈총 실탄 60발을 탈취해 내무반에서 청소 중이던 동료들과 나눠 가졌다.━

총소리를 신호탄으로 실미도 탈출
오전 6시30분. ‘탕’.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을 시작으로 공작원들은 기간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0여분간의 총격전 끝에 공작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탄약창고를 털어 기관총과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실탄을 챙겼다. 부대를 장악한 공작원들이 다시 내무반 앞에 집결했다. 24명이던 공작원 중 2명이 교전 중 숨졌고, 생존자는 22명이었다. 공작원들은 다시 위장복으로 갈아입고 서울행을 결의했다. “서울 중앙청이나 사령부로 가 우리들의 억울함을 알리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폭하자.”

“기간병을 사살하지 않고는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각자 장전된 소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서천 공작원·재판기록) “공작원들이 ‘기간병 한 명쯤을 증인으로 남겨놓자’며 나를 살려줬다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생존 기간병 한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탈출한 직후 찍은 실미도 해안 모습. 중앙포토━

군, 초병 ‘중무장 병력 이동’ 보고에 비상
오전 8시45분. 공작원 22명은 실미도 근처 무의도에서 구한 작은 고깃배를 타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정기성 등 공작원 4명이 배를 구해왔고, 나머지는 산 중턱에 몸을 숨긴 채 건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실미도를 출발한 공작원들이 탄 고깃배는 정오쯤 인천 송도 앞바다에 닿았다. 배에서 뛰어내리자 무릎까지 빠졌다.

갯벌을 빠져나온 공작원들을 육군 33사단 해안 초소병이 막아 세웠다. “잠깐 멈추시오. 어디서 온 부대입니까?” 초병의 눈초리가 번뜩였다. 정기성 공작원이 나섰다. “이거 보면 모르나.” 낙하산 모양의 부대 마크를 보여주며 “훈련 중”이라고 쏘아붙였다. 기세에 눌린 초병이 물러섰다.

오후 1시. 송도에서 인천 시내로 넘어가는 조개 고개에서 공작원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군복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물을 나눠 마셨다. 마침 고개를 지나던 항도여객 버스를 잡아 탔다.

승객 6~8명이 타고 있었다. “서울로 가자!” 겁에 질린 운전기사가 버스를 출발하는 순간 매복해 있던 군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해안 초소를 무사 통과한 만큼 큰 탈 없이 서울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란 공작원들의 기대는 착오였다. 육군은 해안 초소로부터 ‘자동화기로 중무장한 위장복 차림의 병력 20여명이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3~5분간의 교전 끝에 공작원 3명이 숨졌다. 또 버스 운전사가 오른팔 관통상을, 육군 하사 1명이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서울 도착했지만 6시간 만에 탈출 실패
오후 2시15분. 군의 추격을 따돌린 공작원들은 수원발 태화여객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버스 승객 7~8명이 탑승한 채였다. 삼거리에서 버스가 나타나자 노량진 경찰서 기동타격대가 총탄을 퍼부었다. 경찰의 급습을 받은 공작원들도 창밖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버스는 경찰의 총탄을 뚫고 수백m를 달렸지만 끝내 유한양행 본사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섰다. 버스 안에 이제 남은 공작원은 8명, 피땀에 젖은 이들은 작전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실미도를 탈출하며 실패하면 자폭한다고 결의했던 공작원들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버스에서 민간인들이 기어 나오는 걸 보고 회사(유한양행) 간호사를 데리고 제일 먼저 버스에 올랐습니다. 운전석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이 운전대를 끌어안고 축 늘어져 있었어요. 공작원들은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고,

민간인들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터지지 않은 수류탄 2발도 보였고요. 부상자를 부축해 밖으로 내보내 잔디밭에 눕혔습니다.” (당시 유한양행 직원 이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서울 대방동 삼거리 인근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이 자폭한 버스 내부 모습. 

정부 “무장공비 침투, 특수범 난동” 발표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출은 약 6시간 만에 서울 대방동에서 끝났다. 이날 공작원 24명 중 20명이 숨졌고, 4명 만이 살아남았다. 또 민간인 6명, 군경 20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인 오후 3시쯤 간첩대책본부는 “무장공비들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 민간버스를 탈취해 부평을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가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 약 3시간 뒤인 오후 6시 36분 정래혁 당시 국방장관이 발표를 수정했다.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된 데 불만을 품고 관리원들을 사살, 집단으로 탈출, 난동을 벌였다.” 국방부의 발표 직전 실미도에서는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의 최모 대위가 실미도 부대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24명은 누구일까. 군은 어떤 이유로 사건 발표 직전 관련 서류를 모두 태워버린 것인가. 다음 회에서는 실미도 공작원 24명은 누구이고, 실미도 부대는 왜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실미도 부대 창설 직전 북한의 '김신조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국방부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1971년 8·23 실미도.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도심 총격전 끝 24명 즉사·사형…실미도 50년, 총성의 진실,

 

실미도

(영어: Silmido)는 백동호의 원작 소설 실미도를 영화화한 2003년 12월에 제작된 대한민국 영화이며 안성기 (최재현 역)는 해당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실미도 사건을 다룬 <쿠데타>란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었고 드라마 PD 출신 김종학 감독이 이 작품으로 영화감독 데뷔를 할 계획이었으나[1] 제작비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좌절됐다.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완전한 전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는 것이 하루하루 늦어지다가 결국은 불만이 폭발해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1108만명의 관객 동원으로,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명 이상의 압도적인 관객 수를 기록한 역대 최대 기록이다.

본 작품을 계기로 오랫동안 잊혀 왔던 실미도 사건을 영화로 재구성하는 등 큰 호평을 얻었으며, 실미도 부대와 같은 북파부대에 대한 소재를 다룬 내용이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영화가 큰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계기로 실미도도 관광지로 개발되기도 했다.

 

캐스팅

중심 인물

조연

훈련병

기간병


그 외 인물

스태프

  • 감독 : 강우석
  • 조감독 : 심혁, 강지은, 백상열
  • 연출부 : 유대현, 백성기, 유대현
  • 스크립터 : 조은진
  • 각본 : 김희재
  • 원작 : 백동호
  • 촬영 : 김성복
  • 촬영팀 : 이춘희, 김종선, 강상모, 김수원, 이정환
  • 조명 : 신학성
  • 조명팀 : 김연주, 전병윤, 이경복, 양준혁
  • 스틸 : 최효선, 황난요
  • 기획 : 김형준, 이종선
  • 프로듀서 : 이민호
  • 제작부 : 석재승, 김민영, 이승원
  • 제작실장 : 정선영
  • 제작부장 : 김진휘, 윤종호
  • 제작관리 : 최선희
  • 제작회계 : 조은아, 김지영
  • 동시녹음 : 김원용
  • 음향 : 김석원
  • 음악 : 조영욱, 한재권
  • 미술 : 정은정
  • 특수효과 : 정도안, 이희경 (데몰리션)
  • 특수분장 : 신재호
  • 특수분장팀 : 이종환, 신주희, 김승배
  • 특수효과팀 : 임승범, 송재원
  • 시각효과 : 문병용
  • 분장 : 김유정
  • 의상 : 신승희
  • 소품 : 이태우, 김태욱
  • 특수소품 : 오선교
  • 편집 : 고임표
  • 네가편집 : 이송이
  • 색보정 : 신충섭, 이용기
  • 메이킹 : 주경탁
  • 마케팅책임 : 이재진
  • 무술감독 : 정두홍, 유상섭
  • 수중촬영 : 조덕연
  • 수중촬영팀 : 신명진, 노학수
  • 디자인팀 : 김웅
  • 세트책임 : 이치우, 김영수, 이기석
  • 세트팀 : 박근수, 김정곤, 이광봉, 김보관, 김홍섭, 나병진, 노경택, 이종민
  • 소품팀 : 김윤석, 구혜진, 이재욱, 배명호, 김두영, 남경희
  • 특수소품팀 : 김현정, 유주오, 허종복
  • 의상팀 : 이무희, 위진선, 이윤경, 이경하
  • 분장팀 : 임경선, 손영주, 이은희
  • 헤어 : 최가을헤어드레서
  • CGI 테크니컬 감독 : 디지털F
  • X 슈퍼바이저 : 이득진
  • 2D 아티스트 : 서성길, 이병원, 정현수
  • 3D 아티스트 : 이상길, 이원, Flim Scan
  • 레코딩 : 최호용
  • 붐오퍼레이터 : 선훈, 안병우, 배정률
  • 다이얼에디터 : 최은아
  • 사운드이펙트 에디터 : 박주강, 박진홍
  • 폴리아티스트 : 박준오, 심규종, 문재홍
  • 레코딩믹서 : 김창섭
  • 사운드 옵티컬 : 홍윤성
  • 돌비 컨설턴트 : 김재경, 류재정
  • 작곡 : 이지수, 최승현
  • 포스터 : 정승혜
  • 해외마케팅&세일즈 : 정현진, 김대연, 김도욱
  • 홍보마케팅 : 이노기획
  • 온라인마케팅 : 모비존
  • 해외촬영감수 :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 무술팀 : 서울액션스쿨, 김민수, 이홍표, 서지오, 정창현, 윤정석, 서승억, 지중현, 박성규, 서준호, 박규천, 문상무, 한선랑, 손정민, 이정필, 송민석, 장영진, 강영묵, 이기완, 백동현, 구정욱, 권승구
  • 해외촬영지원 : 이종율, 김기찬, 오민
  • 수중촬영기술지원 : 조대연, 오호송, 안종혁, 신영철
  • 수중촬영코디네이터 : 고두현
  • 세컨드 카메라 : 문용식, 황서식
  • 세컨드 카메라팀 : 홍승완, 서명성, 김문석, 나승용, 김민규, 황보성
  • 세컨드 녹음팀 : 강봉성, 주종호, 김희연, 오상민, 이병한
  • 해외촬영지원 : 정현진
  • 몰타 촬영코디네이터 : 김연화
  • 몰타 스태프 : MFS Studio, 코르넬리아 죠파르디 셸만, 마크 카루아나, 시몬 산손, 박지안, 최명준, 심현수
  • 뉴질랜드 촬영코디네이터 : 빔 프로덕션
  • 레코딩 슈퍼바이저 : 김의신
  • 운송 : 정진우
  • 발전차 : 홍승표, 김영욱
  • 촬영장비 : 신영필름
  • 조명장비 : 한솔라이트
  • 조명크레인 : 칠성크레인, 고공크레인
  • 렉카 : 우민호
  • 소품차량대여 : 백중길
  • 세트협력 : 아산건설
  • 필름 : 홍성곤
  • 스퀴즈 옵티칼 : 이메지카
  • 스퀴즈 코디네이터 : 조명배
  • 자막 : 주광동
  • 세트장 : 한화성,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종합촬영소, 김세창, 아트서비스
  • 캐스팅지원 : 양창용, 조성기, 민양기
  • 보조출연 : 서울 나눔기획, 장현진, 배현호, 강유근
  • 부산촬영지원 : 부산영상위원회, 신용남, 장덕진
  • 인보험 : 안용진
  • 총기수입처 : PROPS Co., LTD
  • 총기수입대행 : 장군총포무역상사 (이승형 과장)
  • 매니저 : 박신, 이용혁, 박신, 신성호, 김영일, 김석준
  • 실미도 수송 : 이동일 선장
  • 한맥영화 기획실장 : 박종근
  • 한맥영화 기획실 : 김태형
  • 광고디자인 : JA夢

 

출처 ^ 참고문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1권』(국방부 과거사진상규면위원회, 2007)

 

#실미도 #실미도 #국방부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도심 총격전 끝 24명 즉사 사형 #실미도 50년 #총성의 진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24명 #실미도 부대 창설 직전 #게릴라 부대 #북한의 '김신조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다 #정부 “무장공비 침투 #특수범 난동” 발표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출은 약 6시간 만에 서울 대방동에서 끝났다 #공작원 24명 중 20명이 숨졌고, 4명 만이 살아남았다 #민간인 6명, 군경 20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인 오후 3시쯤 간첩대책본부 #무장공비들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 #민간버스를 탈취해 부평을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 #약 3시간 뒤인 오후 6시 36분 정래혁 당시 국방장관이 발표를 수정했다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된 데 불만을 품고 관리원들을 사살 #집단으로 탈출 #난동을 벌였다 #국방부의 발표 #실미도에서는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의 최모 대위가 실미도 부대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 #해안 초소 #초소병 #실미도를 출발한 공작원들이 탄 고깃배는 정오쯤 인천 송도 앞바다에 닿았다 #중앙정보부 #실미도사건 #實尾島事件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