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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군 사령관의 NYT 기고…!? "우리는 배신당했다",,,

'아프간 군 사령관의 NYT 기고…!? "우리는 배신당했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에 의해 무너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사령관이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우리는 배신당했다"고 토로했다.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서 육군 부대를 지휘하다 카불 함락 직전 특수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3성 장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미 사다트는 "난 지쳤고, 좌절했고, 화가 난다"라고 말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연설에서 "아프간군조차 자신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미군이 죽을 수도, 죽어서도 안 된다"고 언급한 대목을 강하게 반박했다.

사다트 장군은 "아프간 육군이 싸울 의지를 잃은 것은 사실"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사미 사다트 장군 [AFP=연합뉴스]

라면서도 "이는 미국 동맹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느낌과 지난 몇 달간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서 드러난 우리에 대한 무시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프간군도 정실 인사와 관료주의 등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며 "우리의 동맹들이 이미 싸움을 멈췄기 때문에 우리도 결국 중단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다트 장군은 "카불과 워싱턴의 정치적 분열이 아프간 육군을 목 졸랐다"고 덧붙였다.

'아프간군이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지난 20년간 전체 병력의 5분의 1인 6만6천명이 전사한 사실을 거론한 사다트 장군은 "아프간군이 무너진 이유는 3가지"라며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평화협정 ▲ 군수지원과 정비지원 중단 ▲ 아프간 정부의 만연한 부패 등을 이유로 꼽았다.

아프가니스탄 관련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겹쳐,

지난해 2월 카타르 도하에서 체결된 미국과 탈레반의 협정으로 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하면서 그전까지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하던 탈레반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는 계속 싸웠으나 바이든 대통령이 4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계획을 고수하겠다고 확인하면서 모든 것이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군수업체들이 먼저 철수하면서 기술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고, 이들 업체가 소프트웨어를 가져가는 바람에 첨단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사다트 장군은 전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사미 사다트 장군 [AFP=연합뉴스] 겹쳐,

사다트 장군은 "우리는 정치와 대통령들로부터 배신당했다"며 "아프간 전쟁은 국제 전쟁이다.

하나의 군대만으로는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탈레반 왈(曰), 평화협정 믿은 미국! 미안하다 고맙다 아프간은 내가 접수한다,

아프간사태를 보며 "협정 믿는 바보들 아직 있다,

정용진, 아프간 사태에 “협정 철석같이 믿는 바보들 아직 있다”... 文정부 겨냥?
최종수정 2021.08.19. 오전 10:24 기사원문 스크랩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뉴시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또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신 발언을 내놨다.

정 부회장은 19일 ‘미군만 철수하고 평화협정은 휴지됐다’라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다룬 기사를 공유하며 “협정은 역사적으로 지켜진 사례가 거의 없다.

협정을 철석같이 믿는 바보들이 아직 있다”라고 했다.

사실상 북한과의 평화협정에 매달리는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발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인사가 정치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네티즌들은 해당 게시글에 “개념 있는 경영인” “맨날 뒤통수 맞고 쌀 준다고 헛소리”

“대깨문 발작버튼 누르지 마세요. 이마트 못 갈까봐 겁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정용진 부회장은 앞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일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글귀가 포함된 음식 감상평을 남겨 논란이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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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문구는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쓴 문구다.

여권 지지자들은 정용진 부회장이 사실상 문 대통령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라며 불매운동을 선언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논란이 커지자 지난 6월 “홍보실장이 오해받을 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50년 넘는 습관도 고쳐야 한다”라는 게시물을 올린 후 논란이 될 발언을 자제해 왔었다.

 

[출처] 탈레반 왈(曰), 평화협정 믿은 미국! 미안하다 고맙다 아프간은 내가 접수한다,

정용진 아프간사태를 보며 "협정 믿는 바보들 아직 있다"

 

美의회, 문대통령 방미중에 '종전선언·평화협정 촉구' 법안발의,

셔먼 하원의원 등 4명 "전쟁상태 지속은 도움 안돼..군사대치 회피 노력 다해야"

이산상봉 위한 미국인 방북 허용 요구..의회 강경론 여전해 통과 가능성 미지수

미국 의회에서 한국전쟁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를 촉구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브래드 셔먼 민주당 의원은 20일(현지시간) 이런 내용을 담은 '한반도 평화 법안'(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ct)을 발의했다.

브래드 셔먼 미국 하원 민주당 의원 [EPA=자료사진] (워싱턴=연합뉴스) 겹쳐, 

같은당 로 칸나, 그레이스 멍, 한국계 앤디 김 하원의원도 발의자에 이름을 올렸다.

미 의회가 한미동맹 강화나 종전선언 추진 등을 위한 결의안을 추진하거나 처리한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법안 형태로 미 의회에 제출된 것은 처음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를 통한 대북 정책을 공식화한 상황에서 미 의회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안이 발의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 입구로써의 종전선언을 강조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기간에 법안이 발의되면서 '한반도 평화시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법안의 핵심은 한국전쟁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 요구다.

법안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와 항구적이고 굳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미국이 관여하는 회담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남북정상의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약속을 감안하면, 국무장관은 북한과 남한, 미국 사이의 전쟁 상태에 대한 공식적이고 최종적인 종식을 구성하는 구속력 있는 평화협정을 위해 남북과 긴급한 외교적 관여를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국무장관이 법률 제정 180일 이내에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협정 달성을 위한 명확한 로드맵을 기술한 보고서를 상원과 하원 외교위에 제출하도록 했다.

법안은 또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양국 국민의 염원에 따라 새로운 북미 관계를 수립한다'는 합의가 포함된 미북 간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고려하면, 국무장관은 북미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 위한 북한과의 협상에 돌입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법안은 "정전협정은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것도 아니고, 평화적인 최종 해결을 뜻하지도 않는다"며 "전쟁 상태 지속은 미국과 동맹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앤디 김 미국 하원 민주당 의원 [UPI=연합뉴스 자료사진] 겹쳐,

그러면서 "바이든 정부는 대북 정책에서 한반도 평화를 목표로 삼는 싱가포르 합의 틀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며 "미국은 한국전쟁 종식을 위해 지속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외교적 절차를 추구해야 하며,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를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 행정부의 북한 여행 금지 조처가 북한에 친척을 둔 한국계 미국인의 인도주의적 방북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서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법안은 약 10만 명의 미국인이 북한에 친척을 두고 있다며 "한국전쟁 지속의 주요 결과 중 하나는 미국이 북한과 공식 관계를 맺지 못해 북한에 친척을 둔 한국계 미국인들이 가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방북의 미 국익 부합 여부와 인도주의적 고려사항 등이 검토되어야 한다면서, 특히 미국 국적자 친척의 장례 등에 대한 참석을 위한 방북을 위해 특별인증여권 발급 등 자격을 줄지를 행정부가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셔먼 의원은 "한반도의 계속되는 전쟁 상태는 미국은 물론 한국과 북한에 친척을 둔 주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안의 상정과 통과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난관이 예상된다.

의회를 통과하면 구속력을 지녀 행정부가 이를 정책화해야 하는데, 특히 공화당을 중심으로 대북 강경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당시인 2019년 2월 하원에서 발의된 종전선언 결의안에는 52명이나 서명했지만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지 못한 채 폐기된 바 있다.

여야 의원 186명 "美의회 '한반도 평화법안' 발의 환영"

국힘 향해 "한반도 종전선언 결의안 논의 동참을"

국민의힘을 뺀 여야 의원 186명은 21일 "미 연방의회 역사상 최초의 '한반도 평화법안' 발의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국회 정보위원장인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정의당·열린민주당·기본소득당 소속 의원들은 이날 오후 국회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전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브래드 셔면 의원 주도로 발의된 이 법안은 ▲한국전쟁의 공식 종전 및 평화협정 추진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북미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적 검토 요구가 골자다.

이에 대해 여야 의원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법안"이라며 "지난 회기 동안 미 연방의회에 발의되었던 ‘종전선언 결의안’들보다 그 의의가 크다"고 호평했다.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평화체제로 이행해 나가기 위해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 발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2020.06.15.  [서울=뉴시스]  겹쳐,

이들은 "한반도 종전선언은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정치적 선언"이라며 "그럼에도 제21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발의한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의 한번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멈춰 서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먼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새로운 평화체제로 나아가자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게 된다면, 미국과 북한 등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민의힘도 결의안 논의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다"면서 보수 야당에 종전선언 결의안 동참을 호소했다.

김경협 의원을 비롯한 범여권 의원 174명은 6·15 공동선언 20주년인 지난해 6월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을 발의한 바 있다.

 

중동평화협정의 어제와 오늘 미국 대통령의 지원과 압박, 외교적 상상력이 성공한 협상,,,

중동평화협정의 어제와 오늘

미국 대통령의 지원과 압박, 외교적 상상력이 성공한 협상의 원동력

글 : 성일광 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

사다트, 욤 키푸르전쟁으로 이스라엘을 패전 위기로 몰아넣은 후 평화협정 추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끌어내

장성 출신 라빈의 도덕성과 지도력이 오슬로평화협정 가능케 해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오슬로 협정, 단계적 합의방식 취해

成日光

1972년 출생. 이스라엘 히브리대학 중동학과 석사. 텔아비브대학 중동학 박사. 연합뉴스 예루살렘 통신원·한국중동학회 총무간사 역임. 현 한국이스라엘학회장·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

1993년 9월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오슬로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부터 시작된 10여 차례의 알리야(유대인 이민)를 거치면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 팔레스타인 노동자와 경쟁하면서 경제적 갈등이 싹텄다.

또한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 지주에게 웃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해 서서히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영토적 갈등이 중첩됐다.

1917년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된 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 간의 무력(武力)충돌은 악화됐다.

1936년 팔레스타인 주민과 아랍인들은 영국의 위임통치와 친(親)유대인 정책에 반대해 6개월에 걸친 대규모 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유대인 정착민과 충돌했다.

유엔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 해결을 위해 1947년 유대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로 나누는 분할안(案)을 제시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를 수용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포함한 아랍 측은 아랍인구보다 적은 유대인에게 너무 많은 영토를 할당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6일전쟁과 汎아랍주의의 몰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선언했다.

다음 날 주변 아랍국가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1차 중동(中東)전쟁이 일어났다.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분리시켜 논할 수 없게 됐다.

10개월간의 전쟁이 끝나고 1949년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은 로도스 섬에서 열린 휴전협정에서 새로운 국경선, 즉 녹색선(green line)을 확정했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은 범아랍주의(Pan-Arabism)의 영웅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國有化)에 반대해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전쟁 중단 압박으로 전쟁 개시국 3국이 정전(停戰)에 합의하면서 나세르는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해 이스라엘과 서방 세계에 저항한 아랍의 영웅으로 자리매김됐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종결되어 ‘6일전쟁’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악화시킨 전쟁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시나이 반도 주둔 유엔군을 철수시키자 이스라엘은 전쟁 이유(casus belli)로 간주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전쟁 개시 3시간 만에 이스라엘 전투기가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공군기지를 공습해 이집트 공군력을 무력화(無力化)시키면서 쉽게 승리했다.

전후(戰後)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동예루살렘과 골란 고원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차지한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권고한 유엔안전 보장이사회 결의안 242조와 338조 이행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빼앗은 요르단의 영토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문제의 씨앗을 스스로 안게 된 셈이다.

6일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범아랍주의의 몰락이다.

1950년대부터 나세르가 통치이념으로 활용하고 시리아와의 통합아랍국가(United Arab Republic,1958~1961) 건설로 결실을 맺은 범아랍주의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6일 만에 패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아랍민족의 통합만이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에 맞설 수 있다는 범아랍주의의 정당성은 막강한 이스라엘 군사력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범아랍주의의 폐기는 향후 중동정치 질서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이슬람주의(Islamism 또는 political Islam) 등장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전쟁과 평화의 대통령 사다트

부통령이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새로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6일전쟁에서 패한 나세르는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었고 3년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78년 9월 카터 미국 대통령의 노력으로 베긴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오른쪽)은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했다.

제4차 중동전쟁의 씨앗은 이스라엘의 오만과 오판(誤判)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나세르와는 거리가 먼 사다트의 평화협상 제안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사다트에게는 전쟁을 일으킬 담력이 없다고 오판했다.

사다트의 외교적 고립도 제4차 중동전쟁의 또 다른 이유다.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이스라엘에 대적할 만한 최신 군수물자 지원을 거부하자 소련 대사관 축소와 소련 군사지원단 철수를 명했다.

사다트는 미국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추진했으나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73년 사다트는 평화협상에 관심 없는 이스라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대인의 속죄일(욤 키푸르)에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욤 키푸르 전쟁은 네 차례의 이스라엘과 아랍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고전(苦戰)한 전쟁으로 남았다.

이스라엘은 결국 미국의 도움으로 막바지에 전세(戰勢)를 역전시켜 시나이 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후(戰後) 미국은 중동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셔틀 외교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상을 진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키신저 장관은 1974년 초 시나이 협정 I과 1975년 시나이 협정 II를 중재해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가 빼앗긴 시나이 반도 반환 합의에 성공해 이집트의 신뢰를 얻었다. 시나이 협정으로 자신감을 얻은 사다트는 1977년 아랍 지도자로는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의 기틀을 닦았다.

1978년 9월 5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추가협상을 위해 므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메릴랜드주 소재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했다.

12일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두 정상은 그해 9월 17일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의 완전 철수를 포함해 양국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키로 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합의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아랍권의 여론을 의식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창설하는 계획을 합의안에 담았다.

6개월 후 1979년 3월 26일 양국 정상은 백악관에서 양국 간 관계 정상화를 통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사다트가 아랍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합의한 이유는 시나이 반도 회복과 미국의 대규모 경제지원 때문이었다.

아랍권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없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를 아랍연맹에서 퇴출시켰다.

이집트의 외교적 고립은 가속화됐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결정권이 있다며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거부했다.

 

마드리드 평화회담

1991년 3월 6일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제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종식해야 할 때가 왔다”고 미 의회에서 천명하고 중동평화회담을 추진했다.

이후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8개월간의 셔틀외교 끝에 1991년 10월 마드리드 평화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에는 부시와 고르바초프 대통령 외에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와 레바논 대표단뿐 아니라 요르단-팔레스타인 연합 대표단이 참석했다.

팔레스타인 측은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했지만 이츠하크 샤미르 이스라엘 총리는 팔레스타인 자치를 고수하면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참여국 간 양자협상은 워싱턴에서, 다자(多者)협상은 모스크바에서 이어 나갔다.

워싱턴 협상은 1993년 중단되고 비밀 협상인 오슬로 협상이 시작됐다.

중동평화협상을 꺼려 온 이스라엘이 1991년 마드리드 협상과 1993년 오슬로 협상에 임하게 된 배경은 1987년 시작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무장봉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 무장봉기는 이스라엘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판에 직면한 이스라엘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반면,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1991년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지지한 이후 외교적 입지가 좁아졌고 걸프 국가의 재정 지원도 끊어지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연합 대표단이 참가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직접 협상이 성사되지 못한 마드리드 협상과 달리 오슬로 평화협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비공개로 직접 협상에 임하면서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오슬로 협상은 1992년 12월에서 1993년 12월 최종 승인까지 약 1년간 오슬로와 런던을 오가며 미국을 배제하고 비공개로 진행됐다.

1992년 4월 노르웨이 연구소 FAFO 소장이던 테르예 뢰드 라르센이 이스라엘 정치인 요시 베일린에게 이스라엘과 PLO를 중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해 9월 노르웨이 외무차관 얀 에겔랜드가 텔아비브를 방문해 외무부 차관이 된 요시 베일린에게 재차 협상 중재를 제안했다.

그해 12월에서 1993년 4월까지 베일린 차관이 지명한 비공식 협상가 야이르 허쉬펠드 하이파 대학 교수와 론 푼닥 교수는 PLO 재무장관 아흐마드 쿠레이를 만나 14차례 비밀회동을 가졌다.

쿠레이 장관은 예비협상이 충분한 만큼 이스라엘 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과의 실질적인 협상을 요청했다.

우리 사비르 이스라엘 외무부 국장이 8월까지 8차례 쿠레이와 회동을 이어 갔다.

 

오슬로 평화협정

그는 쿠레이와 회동을 갖고 사비르와 쿠레이의 합의 서명을 직접 참관했다.

협상이 마무리될 무렵인 1993년 8월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은 오슬로를 비밀리에 방문했다.

한 달 후 9월 PLO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는 합의안에 서명했다.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는 암살당한 라빈 총리의 뒤를 이어 오슬로 평화협정을 충실히 이행하려 노력했다. 

이로써 협정에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같은 달 13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백악관에서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날 체결된 오슬로 협정 I은 PLO와 이스라엘 정부를 상호 인정하는 서명과 5년 내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정하는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DOP)으로 나눌 수 있다.

오슬로 I은 5년 내에 2단계를 거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우선 가자지구와 예리코(성경의 여리고)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한 이후 총선을 통해 의회를 선출한 다음 나머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는 방식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최종 지위 문제, 즉 국경확정, 예루살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협상은 오슬로 협정 3년 후에 논의를 시작해 2년 내 즉 오슬로 협정의 종결 시한 내에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합의 이행 첫 단계로 1994년 5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의 통치권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겼다.

1995년 9월 합의된 오슬로 II의 내용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나머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 철수 계획안, 공동 치안 협의와 향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로부터 돌려받을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A, B, C 3개의 지역으로 나누는 계획안으로 구성돼 있다.

A지역은 전체 반환 영토의 18%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와 치안 모두 담당하는 지역이다.

B지역은 21%로 팔레스타인이 통치하지만 치안은 이스라엘과 공유한다.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와 치안 모두를 담당하는 지역으로 61%이다.

오슬로 협정의 가장 큰 위기는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에게 암살되면서 갑자기 찾아왔다.

총리직을 이어 받은 페레스는 약속대로 12월 6개 주요 팔레스타인 도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오슬로 협정의 표류

반면 이스라엘은 오슬로를 팔레스타인이 독립을 할 준비가 됐는지 시험하는 과정과 준비단계로 인식했다.

아라파트 의장에게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지위와 자결권(自決權) 획득으로 가는 임시 과정일 뿐만 아니라 PLO가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대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인정을 받고 국제사회의 정당성을 얻은 기회였다.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의 유대인들. 유대인 정착촌 문제는 중동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베일린은 “오슬로 협정이 중단된 이유는 양측 극단주의 세력의 방해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아라파트가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테러 행위를 막지 못하자 이스라엘 여론은 평화에 대한 팔레스타인 측의 의지를 믿지 않게 됐다.

이스라엘 우파는 라빈 총리를 나치에 비유하고 아라파트에게 이스라엘의 안보를 팔았다며 라빈과 오슬로를 악마화한 만큼 아미르와 같은 극우파 급진 유대교인 청년의 라빈 암살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비르 교수는 오슬로 협정이 이행되지 못한 이유를 “양측이 동반자관계의 장점을 활용하기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최대한을 끌어내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오슬로 협정은 1994년 이스라엘이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완전한 이행에 실패하면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이스라엘의 점령을 더 쉽게, 값싸게 더 공고히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 주민의 경제·의료·복지·사회 인프라와 치안까지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겼으며, 오히려 이스라엘 정착촌 주민수는 협정체결 당시 11만명에서 현재 45만명으로 약 4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오슬로 협정 이행을 위한 수차례의 협상이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헤브론 협정

주 내용은 헤브론의 80%에 해당하는 H-1지역은 팔레스타인 측의 통치하에(A지역) 두고, 20% 정도의 H-2지역(B지역)은 유대인 정착민이 거주하는 구시가지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으로 나누고, 유대인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군을 주둔시키는 것이었다.

1997년 1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오슬로 협정을 이행하라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밀려 헤브론 협정에 합의했다.

1998년 10월 빌 클린턴 대통령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초청, 와이리버의정서를 이끌어냈다.

이스라엘 군은 헤브론의 80% 지역에서 철수했지만 정착민 보호를 위해 나머지 20% 지역에 주둔하면서 갈등의 씨앗은 제거되지 않았다.

그해 3월부터 동예루살렘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건설되고 7월과 9월에 하마스가 연쇄 폭탄테러를 벌이면서 합의 이행은 난항에 빠졌다.

폭탄테러 이후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테러활동을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오히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들과 연쇄회동을 갖고 내부 결속력을 과시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협상에서 이스라엘의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교묘히 테러를 활용한다고 비난했다.

1998년 10월 23일 클린턴 대통령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을 미국의 메릴랜드주 와이리버로 초청했다.

그는 이 회담을 통해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정치범 석방 등을 포함하는 와이리버 의정서를 이끌어 냈다.

합의 일부가 이행됐지만 이후 네타냐후 총리는 리쿠드당 내부 반발에 부딪히면서 나머지 사안의 이행이 지연되고 1999년 5월 결국 조기총선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합의 이행은 멀어졌다.

1999년 총선에서 에후드 바라크가 승리하면서 새로운 총리가 되자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클린턴 대통령은 중동평화협상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클린턴의 지원하에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2000년 메릴랜드 캠프 데이비드에서 2주 동안 협상을 이어 나갔지만 캠프 데이비드 II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캠프 데이비드 II의 실패와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성전산에 출입하는 사건은 팔레스타인의 민심을 자극했다. 이는 제2차 인티파다로 이어졌다.

 

‘두 국가 해결안’

2005년 아리엘 샤론 총리는 요르단강 서안 협상을 미루기 위한 전략으로 오슬로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약속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과 정착촌을 철수했다.

그러나 2년 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차지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후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수차례 무력충돌하면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만 낳았다.

더 뼈아픈 현실은 팔레스타인 정파가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요르단강 서안의 온건파 파타로 양분되면서 이스라엘과-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더 복잡한 구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여론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에서 철수하면 가자지구와 동일하게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을 통제하게 될 것이라며 평화협상에 반대하며 더 우경화(右傾化)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관련 아랍국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2007년 11월 메릴랜드주에서 아나폴리스(Annapolis) 중동평화 회담을 개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2008년 말까지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은 긴밀한 회동을 통해 ‘두 국가 해결안’에 바탕을 둔 최종지위 협상에서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올메르트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2008년 9월 총리직을 사임하고 12월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무력충돌하면서 평화협상은 중단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측을 협상에 이끌어 내기 위한 유인책으로 정착촌 건설 중단을 요청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를 수용해 2009년 11월 요르단강 서안의 신규 정착촌 건설을 10개월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측은 이미 건설 중인 정착촌과 동예루살렘 정착촌은 예외로 빠졌다며 평화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10개월 동안 팔레스타인 측이 협상불가 방침을 바꾸지 않아 오바마 대통령의 평화협상 중재는 동력을 상실했다.

 

“예루살렘을 위한 난민 귀환권 포기”

만약 로드맵의 일정에 따라 차근차근 이행됐다면 중동의 정치지형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공존을 위한 두 국가 해결안의 로드맵을 마련했지만 완전한 이행에 실패하면서 중단됐다.

두 국가 해결안을 통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가 실현됐다면 이스라엘은 아랍국가와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20여개 아랍국가는 이미 2002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안한 평화안을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되면 이스라엘과 관계정상화를 약속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드는 팔레스타인 어린이. 요르단강 서안에서는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이 진행 중이다. 사진=조선DB

오슬로 협정이 정한 로드맵에서 다뤄지지 않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최종지위 문제는 여전히 협상의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최종지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피력해 발표한 것이 바로 ‘클린턴 초안(Clinton parameters)’이다.

‘클린턴 초안’의 핵심은 “예루살렘을 위한 난민 귀환권 포기”로 팔레스타인 측은 일부 극소수 외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이스라엘 내 귀환을 포기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귀환을 허용하고 예루살렘의 주요 지역을 얻는 것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측은 동예루살렘, 예루살렘 구(舊)시가지 아랍지역 통치권과 하람 앗 샤리프(성전산)의 주권을 얻는 반면 이스라엘은 구시가지 유대인 지역과 통곡의 벽의 관할권을 얻는다.

요르단강 서안지역의 97%를 팔레스타인 측이 돌려받고 나머지 3%는 이스라엘이 보전해 주는 대신 요르단 강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80%는 이스라엘 주권하에 남게 된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큰 틀에서 이 초안을 수용했지만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정을 요구했다.

 

국내외적 정치환경이 중요

과거 성공한 중동평화 협상은 대체로 유리한 국내외적 정치환경의 영향이 매우 컸다.

1974년과 1975년 이집트와의 시나이 협정과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평화협정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1973년 전쟁에서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패전 가능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개전 초기 전세가 매우 불리했던 이스라엘은 심각한 인명 손실을 입었는데 이스라엘 전사자는 6일전쟁 전사자의 약 3배에 가까운 3000명 정도였다.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은 또 이스라엘의 군사전략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대부분의 중동전쟁에서 시리아·이집트·레바논·요르단이 동시에 이스라엘을 협공했었다.

그중 가장 위협적인 이집트가 전쟁에서 빠진다면 이스라엘로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 자명했다.

결국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은 향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전면전(全面戰) 가능성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아랍국과의 최초의 평화협정이라는 함의 역시 매우 중요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의 틀을 적에서 동반자로 바꾸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로드맵을 담은 오슬로 합의안이 어떻게 이스라엘 의회 비준을 통과했을까.

당시 이스라엘 국내 여론은 1987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로 지쳐 있었던 만큼 협상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장성 출신이며 강력한 지도력과 높은 도덕성을 겸비한 라빈 총리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의 전폭적 지지도 큰 몫을 했다.

라빈 총리는 1977년 총리 재임 시절 부인 레아 여사가 외환관리법을 위반해 미국환 달러 통장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체 없이 총리직을 사임했다.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이후 라빈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의회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집권 노동당은 메레츠당과 연정을 통해 이스라엘 의회 총 120석 중 62석을 확보했었고 아랍 정당의 지지도 얻어 비준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당근과 채찍

협상 중재의 효율성에서 보면 오슬로 평화협상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열정과 개인적인 헌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린턴 대통령보다 중동평화협상에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은 미국 대통령은 이전에도 없었고 향후에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장 좋은 예로 클린턴은 북핵 문제 대신 중동평화협상을 택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려 했지만 평화협상을 도와달라는 아라파트 수반의 간곡한 요청에 평양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밝힌 바 있다.

결론은 중동특사 임명만으로는 어렵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협상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협상 중재국으로서 이스라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만큼 미국을 대체할 만한 다른 강대국은 찾아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이 협상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 미국은 당근뿐만 아니라 외교적 압박을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1975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와의 평화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6개월 동안 군사지원 합의를 미루면서 압박했다.

1991년 마드리드 평화협상 과정에서 샤미르 이스라엘 총리가 정착촌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시 대통령은 소련과 외국에서 입국한 유대인 이민자 정착 지원에 필요하다며 이스라엘이 요청한 100억 달러 담보 대출을 거절하는 초강수를 두며 압박했다.

당근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움직일 수 없는 만큼 채찍을 써야 한다는 교훈을 과거 협상에서 배울 수 있다.

미국의 유대인 로비단체의 영향력과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수관계를 감안한다면,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특히 연례총회 모임에 미국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한다는 미국 최대 유대인 로비단체 미국-이스라엘공공문제위원회(AIPAC)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12월 이스라엘 정착촌을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334호 비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기권표를 던지도록 했다.

결국은 의지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모험심과 외교적 상상력

중동평화협상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 협상의 기술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다.

주변 아랍국가의 반대에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에 합의한 가장 중요한 유인책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나 막강한 군사력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미국이 매년 제공키로 한 15억 달러의 경제·군사지원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국과 협정을 맺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결구도 종식으로 얻는 유인책 역시 협상 타결의 중요한 변수임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오슬로 협정 성공의 비결은 협상의 가장 중요한 관련 당사국인 미국을 배제하고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창설 방안을 끝까지 밀어붙여 상세한 합의안을 도출한 과감한 추진력이었다.

모험심과 외교적 상상력의 최대치가 결합된 합의가 오슬로 협정이었다.

협상 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오슬로 협정의 공통점은 단계적 합의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은 시나이 협정과 캠프 데이비드 협정 단계를 먼저 밟은 다음 성사됐고 오슬로 협정은 오슬로 I과 II를 거쳐 최종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방식이었다.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완전히 중단된 상태이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후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UNRWA)’에 대한 자금지원 중단을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평화협상을 거부하는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무작정 협상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럼프의 중동 평화안을 들어 보고 이스라엘의 입장을 확인한 후에 협상을 거부해도 늦지 않다. 다시 한번 과감함과 틀을 깨는 모험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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